이까짓 물건을 사느라고
물욕과 소비욕은 다르다.
회사를 그만두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좁은 집에 온종일 있으려니 너무 갑갑했다. 눈앞에 늘어져 있는 잡동사니들부터 어떻게 좀 해야 했다.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옷부터 시작했다. 귀여운 맛에 사고는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 한 무더기, 왜 샀는지 기억이 안 나고 취향에도 안 맞는 옷이 또 한 무더기, 가격이 저렴해 안 사면 손해 같아서 산 옷도 한 무더기였다. 욕실에 들어가 보니 문제가 더 심각하다. 개봉된 제품만 클렌징 폼이 세 개, 바디워시가 두 개, 샴푸가 세 개였다. 이유가 있긴 있다. 샴푸로 예를 들면, 미용실에서 추천해준 A라는 제품을 쓰다가, 두피가 따가워서 천연성분 위주로 만들어진 B를 샀고, B는 또 너무 세정력이 부족해 다시 C를 샀던 거다. 그렇다 해도 혼자 쓰는 욕실에 열 가지가 넘는 샤워 제품을 늘어놓은 모습이 장관이었다. 욕실을 나오니 이번에는 마사지 볼 두 가지, 마사지 롤러 두 가지, 스트레칭 기구 세 가지가 작은 방 한편에 웅크리고 있었다. 사놓고 안 읽은 책이 책장 한 줄을 다 차지하고, 역시 안 쓴 노트가 그 아랫줄을 채웠다. 찬장에는 차만 일곱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그 찬장 자체를 열지 않은 지 몇 달은 넘었다.
옷을 좋아하고, 화장품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고, 차를 좋아한다. 좋아하기에 많이 산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분류를 마치고 나니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충동구매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로 스트레스를 풀기 시작한 게 3년 전 즈음이던가. 고민을 거듭하고 기쁨과 편리함을 가져다줄 물건을 들이는 게 아니었다. 구매하는 순간의 기쁨에 그 방점이 찍혀있었다.
물건을 살 때 이 물건을 사면 내 일상이 마법처럼 나아질 거라는 환상도 같이 샀다. 이 옷을 사면 이 모델 같은 분위기를 가지게 될 거고, 이 마사지 용품을 사면 몸이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분위기라는 건 자신의 취향이 물건을 통해 은은히 드러나는 것이지 옷 한 벌로 뚝딱 생기는 게 아니었고, 마사지 용품을 살 때는 매일 몇십 분씩 마사지하는 나의 노력과 시간까지 고려해야 맞았다. 맨손으로 하루 십 분도 마사지하지 않는데, 기구가 생긴다고 갑자기 부지런해질 리 없었다. 많은 물건을 산다고 일상이 편해지는 게 아니었다. 물론 효과가 있었던 적도 있다. 그렇게 많은 물건 중 괜찮은 것 한두 개 있는 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열심히 번 돈을 흥청망청 써버렸던 과거가 집안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혹시나 쓰지 않을까 고민되는 물건들을 제외하고, 당장 버려도 상관없는 것들을 쓰레기봉투에 담아 내놓았다. 서너 개의 봉투 안에 적게 잡아도 동남아 여행 경비 정도는 담겼다. 잡동사니들이 잡아먹었던 공간까지 생각하면, 소비 자체가 주는 미미한 기쁨 대비 너무 큰 비용을 치렀다. 그동안 내가 물욕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욕구는 단지 소비욕이었다.
여전히 물건을 산다. 대신 어디에 둘 것인가, 사용하고 관리하는데 필요한 노력을 고려했는가,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가, 소유하는 만족감을 주는가 등을 충분히 생각한다. 이 문답을 통과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물건은 우리 집 잡동사니 상자 대신 통장에 돈으로 남는다. 황금알을 낳는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