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창조했다고 믿는 많은 것들이 실은 잠들어 있었고, 어떤 사건의 연쇄에 의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관점이란 언제나 이면이 있어서 기존의 관점을 뒤집으면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개체군 사고라는 개념을 접한 적이 있다. 그 시선 안에서는 개체가 실체고 평균은 허상이다. 모든 면에서 평균을 만족하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평균은 실체에서 가장 먼, 도달 불가능한 추상이다. 이런 사고를 가지면 어떤 개성을 가진 개체든 개체가 표준이 된다. 평균을 추종해야 할 이유는 없다.
실제로 이런 관점이 뇌과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내용을 읽기도 했다. 과학적으로는 그러할 지라도 개인에게는 반직관적이고 급진적인 사고인 것 같기도 하다. 실체와 더 가깝다고 해서 더 안전하지는 않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은 원래 혼란스럽다. 그러한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평균적 사고가 도입된 거 아닐까. 있는 그대로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범주적 사고가 더 안전하다. 하지만 조금 심심하기도 하다. 재미는 몰입에서 생기고 몰입은 조금 매몰되기 마련이니까. 조금 비효율적이기 마련이다.
마음에는 한계가 없는 것 같다. 배우 강동원님이 살인자를 연기하면서 마음 안에 어떤 문이 열려버렸다고 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내 삶을 돌이켜봐도 그런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경험맹이라는 개념이 있다. 경험을 하기 전에는 알 수 없던 것이 경험 후에는 선명하게 실체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무언가를 경험하면 다른 내가 된다. 관점이 재구성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을 마주한다. 새로운 진실이 드러나고, 세상은 더 다층적인 공간이 된다. 우리의 존재가 점점 더 짙어진다.
그런 순간이 오면 나는 더 단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거 같다. 마음에는 한계가 없지만 몸의 한계는 명확하다. 뇌라는 신체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결국 한계가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무한히 확장되지 않고 물리적 한계를 경계로 수렴한다. 생활을 가다듬고 일상을 가꾼다. 그 안에서 질서를 찾는다. 그렇게 에너지를 쌓는다. 그게 아마 또 어떤 탐험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세상이 끝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