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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 Nov 17. 2019

오늘, 퇴사합니다.

비 온 뒤 하늘은 맑음

    퇴사하는 날 아침이 밝았다. 내 주위에는 이미 퇴사를 하고 다른 삶을 시작한 사람이 몇 되는데, 그들에게 퇴사의 순간에 대해 물어보면 답은 한결같았다. 그렇게 마음이 가벼울 수가 없다고, 자기를 괴롭히던 옆자리 동료에게도, 직원을 착취하던 상사에게도 '그래 너는 너대로 잘 살아라'라는 너그러운 마음이 들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단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퇴사를 결심한 순간 내 건강 상태는 최악이었다. 똑바로 앉아있기도 힘들 무렵부터 한 달이나 더 출근했다. 그러면서도 남은 업무와 인수인계, 끝내고 싶은 일들을 마무리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가 맡은 일에 몇 가지 이벤트가 생겨 퇴사를 앞둔 마지막 주가 더 분주하게 흘러갔다. 퇴사 전날은 기어코 비가 내렸다. 바람까지 강하게 부는 날 하루 종일 현장을 돌아야 했다. 실시간으로 몸에 열이 났고 이윽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일정을 겨우 마무리하고 책상에 돌아온 순간 서글픈 감정이 몰려왔다. 슬퍼서인지, 아파서인지, 아니면 다 끝났다는 안도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근 몇 주간 꾹 눌러오던 복잡한 마음이 몸이 약해진 틈을 타 흘러나왔다.     

    저녁에는 송별회식이 있었다. 체력은 바닥났고 몸살 기운에 목소리도 안 나오던 상태였기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어서 집에 가서 눕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마무리가 이래서, 마지막이 이래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퇴사의 날이 밝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사실은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서 잘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5년간의 회사생활을 통해 그건 좀 힘들겠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직장인이 그러하듯 나도 직장생활이라는 걸 하면서 사람에 대해 실망도 하게 되고 회의주의자가 되기도 했다. 스물세 살의 나이로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어린 나이에 별다른 각오 없이 시작했던 직장생활이었기에 더 힘든 일이 많았던 것 같다. 누구나 '나'라는 존재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하지만 조직 속에서, 특히나 이익집단 내에서 '나'가 어떤 사람인지는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 알 수 없다. 나도 그런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고, 회사에서 적응하기 좋은 방향으로 변해갔다. 5년이 지나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었고, 그 모습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퇴사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다.     


    결심한 건 더 오래된 일이었지만 건강 악화가 방아쇠를 당겼다. 퇴사 몇 달 전부터 극심한 컨디션 저하를 경험했다. 집에 돌아가면 손 하나 까딱하기 어려웠다. 요리가 취미였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 좀 더 지나니 출근해서 몸을 똑바로 세우기 어려울 정도로 기력이 빠졌다. 집에서는 홍삼을 보내주었고 보약도 먹어보라고 했다. 원래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던 건강 문제가 악화되었다. 다른 문제들도 속속 튀어나왔다. 서너 개의 병원과 대학병원을 들락날락했다. 컨디션 저하는 나를 정말 힘들게 했다. 보통 사람들이 볕이 쨍쨍한 사월의 한낮을 걷는다고 치면, 나는 우중충 비가 내리는 시월의 저녁을 걷는 기분이었다. 긍정적인 생각이 자라날 리 없었다. 퇴사하고 싶다고 밝히고 나서 집과도 마찰이 생겼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동안 의미 없는 시간이 또 한 무더기 지나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확신이 들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지금이 마침표를 찍고 새로 시작할 때다.     


    정리를 거의 다해 텅 빈 바탕화면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개인 정보를 정리하고, 빠트린 게 없는지 점검하고, 업무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전화해서 이런저런 경험들을 전달했다. 하루가 둥실둥실 가볍게 흘러갔다. 외부인의 눈으로 회사를 한번 쓱 살폈다. 깨끗한 공간, 좋은 집기류, 커피 머신이 놓인 모임공간, 블라인드를 통해 볕이 반쯤 들어오고, 에어컨이 선선한 바람을 불어주어 일 하기 좋은 사무실. 이런 곳에서 왜 나 혼자 그토록 고군분투했나 싶어 좀 웃기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이제 곧 회사를 그만두기 때문일 것이다. 시침이 6을 가리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6시 5분, 아주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회사 밖으로 나왔다. 퇴사를 축하해주러 온 친구의 차를 타고 회사를 빠져나갔다. 이제 이 길을 다시 올 일은 없을 것이다. 비 온 다음 날이어서 하늘은 맑았다. 선선하지만 맑은 하늘에 구름이 한두 점 떠있었다. 비 온 뒤 하늘 같은 하루, 비 온 뒤 하늘 같은 마음이었다. 그제야 "사람이 살면서 한 번쯤 퇴사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라고 말했던 친구의 농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퇴사는 아니었다. 건강을 이유로 퇴사하고 싶다고 밝혔는데 회사에서 우선 휴직하고 쉬어보기를 권했다. 처음에는 퇴사를 고집했지만, 주위에서 쉬다 보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고 몸이 나아질 수도 있지 않겠냐고 재차 권유했다. 그런 배려가 고마웠다. 결국, 휴직을 택했고 곧 다시 퇴사했다. 휴직을 해보니 더더욱 퇴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그만두고 나면 삶을 재설계하는 일이 따라온다. 그 과정에서 '이렇게도 살 수 있겠구나, 이게 더 행복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 후에도 삶은 계속되고, 순간순간 새로 배우며 또 후회할 것이다. 막연한 퇴사, 그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사는지 공유하기 위해 차곡차곡 글을 쌓아보려고 한다. 퇴사하고 싶은 사람, 퇴사 한 사람, 회사가 지겨운 사람, 다양한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며 공감하고 또 경험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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