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못 버티면 어딜 가나 똑같아.
신입사원이 한 달 만에 퇴사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선배가 혀를 찼다. 저번 달에 뽑은 신입사원 중 한 명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저는 이 회사와 잘 안 맞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퇴사했단다. 이런저런 말들이 오고 갔다. '한 달도 안다녀 보고 맞는지 안 맞는지 어떻게 안다는 거야', '우리 회사 정도면 좋은 회산데 여기서 못 버티면 어딜 가나 똑같지', 그런 이야기들이다. 나는 말을 아꼈다. 정말 그 회사가 그 회사고 어딜 가나 똑같을까. 여기서 못 버티면 어딜 가나 마찬가지니 버텨야 할까. 버틴다면 언제까지 버텨야 할까. 일 년을 버티고 그만두는 건 일주일을 다니고 그만두는 것보다 현명할까.
누구나 처음 회사 생활을 시작할 땐 힘들다. 수직적인 구조에 익숙해져야 하고 하나부터 열 가지 다 새로 배워야 한다. 학생 때는 이미 정리된 정보를 흡수하기만 하면 되지만 회사원이 된 이상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에너지가 필요하다. 특별한 문제가 없더라도 일단은 힘들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회사에 대한 애정도 안 생기고 이래저래 잘 안 맞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회사를 나간다. 관문을 통과하고 회사에 자리 잡은 선배들, 말하자면 회사에 남은 사람들은 회사와 비교적 잘 맞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눈에 채 한 달도 안 돼서 뛰쳐나간 신입사원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일 수밖에. '다른 데 가면 고생 안 할 줄 아나. 어딜 가든 똑같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나는 그 신입사원이 어떤 면에서 안 맞는다고 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내가 다녔던 회사는 지방 소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기본적으로 다들 가족, 친구, 연인과 떨어져 생활하고 있다. 기혼자 선배들의 주말부부 비율도 굉장히 높았다. 만약 낯선 도시에 새로 정착해 잘 살아볼 자신이 없다면 어떨까. '회사와 안 맞습니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우리 회사는 굉장히 보수적인 분위기였다. 사람들도 대체로 그런 분위기에 어우러지는 성격을 가졌다. 보수적인 것과 거리가 먼 내 입장에서는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싶은 관점들이 그곳에선 보편적이었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선 다들 별 관심이 없었다. 반면 모두들 열을 올리는 주제에 대해선 내가 관심이 없었다. 여러모로 '이 사람들 참 나랑 다른 생각을 하고 있네'라고 느끼는 지점이 많아질수록, 회사가 품고 있는 스펙트럼 날개 가장자리에 내가 아슬아슬 걸쳐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혼자 '그럴 수도 있지 않나?'라고 생각했던 날, 나도 떠날 사람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한 달 만에 회사를 다 안다고 그래', 반 정도만 맞는 말이다. 회사에는 많은 조직이 있고, 그 안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느리긴 하지만 회사도 변화한다. 그러니 한 달 만에 회사를 속속들이 꿰뚫수 있다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와 맞는지, 맞지 않는지는 하루 만에도 알 수 있다.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 모인 곳에 들어서면 공기에서부터 다름이 느껴진다. 확신을 위해 신중하게 뜸 들이느냐 아니면 다른 기회를 잡기 위해 빠르게 떠나느냐가 사람의 성향에 따라 갈릴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한 달, 어떤 사람은 일 년, 나 같은 사람은 오 년을 꼬박 고민하다 결정을 내린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한 달 만에 퇴사를 결심한 이름 모를 신입사원의 빠른 결단력이 부러울 수밖에.
내가 다녔던 회사는 대체로 평이 좋은 곳이었지만 친한 친구들 중 아무도 나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도 그만두지 않았냐고, 그러다 평생 다니는 거 아니냐고 놀릴 때가 많았다.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이니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어쩔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어울리는 집단은 없으니까.
공대를 졸업하면 대부분 작업복을 입고 현장을 누빈다. 학과 후배 한 명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공장에서 일하기 싫어요. 작업복 입는 게 너무 싫어서요. 그리고 꼭 수도권에서 일할 거예요." 그때도 이미 취업이 어려운 시기였다. 그렇게 입맛에 딱 맞게 골라가는 게 과연 가능할지 의구심이 들었다. 까다로운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했던 후배는 지금 서울에 위치한 회사에서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일하고 있다. 가끔 그 회사 건물을 지날 때면 그때의 대화가 떠오른다. 그가 내가 다녔던 회사에 들어왔다면 한 달이 채 안 되어 그랬을 것이다. "전 이 회사랑 안 맞는 것 같아 퇴사하겠습니다."
자신을 잘 안다는 의미에서 까다로운 것은 참 중요하다. 언제까지 인내가 최고의 덕목일 수는 없다. 이젠 정말 그런 시대가 아니다. 회사에서 한 후배가 말했다. "선배, 그런데 저는 회사생활 재미있어요. 사람들이 왜 불평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만한 회사도 없는데요." 그렇다. 모든 사람이 억지로, 힘들게, 꾸역꾸역 회사를 다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정말 즐겁게, 누군가는 힘들지만 보람 있게, 누군가는 그럭저럭 버티며 회사를 다니고 있다. 나에게 최악의 회사가 누군가에겐 편하고 좋은 곳일 수도 있다. 그러니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고민 없이 던지는 '어딜 가나 다 똑같다'라는 낡은 말은 이제 그만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