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해주세요!
신입사원, '엄살'을 배우다.
타 부서에 별로 급하지 않은 자료를 요청할 일이 있었다. 일주일 안에만 받아도 충분해서, 수화기를 들고 "안녕하세요. 제가 지금 취합하는 자료가 있는데 관리하시는 설비에 관한 내용 작성 부탁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 아, 급한 건 아니고요. 이번 주 금요일까지만 보내주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정도의 대화를 하고 끊었다. 그러나 그 주 금요일이 되어도 자료가 오지 않아서 다시 담당자에게 연락해야 했다. "혹시, 요청드린 자료 다 작성하셨나요?" "그거요? 잊어버렸네요. 빨리해서 드릴게요. 언제까지 하면 되죠?" "아… 그럼 제가 다음 주 수요일까지는 제출해야 하니까 그전까지 최대한 빨리 보내주세요." 결국, 화요일 오후에야 겨우 자료를 넘겨받았고 수정할 내용도 많아 제출 기한을 넘기고 말았다. 그때뿐이 아니었다. 항상 마감을 넘겨 보내 주거나 연장된 기한마저 아슬아슬하게 맞추는 사람이 꼭 한두 명은 있었다.
학생일 때는 오히려 약속한 기한을 어기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팀 과제를 할 때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기야 있었지만, 개념이 없다고 욕을 먹곤 했다. 회사에서는 시간을 더 철저히 지킬 줄 알았는데 이게 뭐란 말인가. 이해도 안 가고 실망스러웠다. 다른 회사에 다니다 온 동기에게 물어보니 회사생활에선 원래 ‘엄살’이 필수란다. 여유 기간이 일주일이면 자료 요청 기한은 이틀이나 삼 일로 하고, 지정된 날짜를 넘어서면 바로 전화해 압박하라고 내게 조언했다. 회사에 다니다 보면 ‘어레인지’, ‘리스트업’, ’ 백업’, ’ 디벨롭’ 등과 같은 업무용어와 친해진다. 이런 상황에는 '팔로우업'이란 말을 쓴다는데, 용어까지 있는 걸 보니 어느 회사나 그렇다는 동기의 말이 사실인가 보다.
급하지 않은 일을 급하다고 해서 상대방의 시간표를 어지럽히는 게 맞는 걸까, 뻔히 해줄 텐데 조금 기한을 넘겼다고 바로 전화하면 기분 나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순진한 생각이다. 다들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가 너무 많다 보니, 그리고 사방에서 급하다며 자료를 요청하다 보니, '급하진 않아요'라고 말하는 내 요청이 뒤로 밀리는 건 당연했다. 회사에서 ‘급하지 않아요’는 ‘한 달은 여유가 있어요’와 비슷한 메시지를 준다. 회사원과 학생의 언어 차이라고나 할까. 역으로 만약 내가 깜빡해서 자료를 보내지 못했는데, 그게 진짜 최종의 최종 기한이어서, 나 때문에 상대방이 일을 그르친다고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하다. 그러니 오히려 어느 정도 여유를 잡아두는 게 상대방에게도 좋은 일일지 모른다.
말 나온 김에 그 엄살이라는 거, 대체 어느 정도 부려야 하는 걸까. 신입사원 시절 내가 했던 실수처럼 내 일을 망칠 만큼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필요는 없다. 여러 가지 상황을 대비해 며칠 분의 엄살을 피우는 게 서로에게 좋은 것 같다. 반대로 너무 심하게 엄살을 피우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 여유를 얻은 만큼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 회사라는 공동체는 그런 소수 때문에 약화되고 무너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