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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어시인 Jun 18. 2021

인수인계서

소통협력부  청각기술팀  업무 인수인계서


 안녕하세요? 소통협력부 청각기술팀 제8대 후배 비서님, 저는 선배 제7대 비서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계약 기간은 이미 끝났지만, 아직 8대 비서님께서 고용되지 않은 상태여서 제가 업무를 계속 담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제가 언제 떠나게 될지 몰라 미리 인수인계서를 작성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계약 기간이 5년으로 되어 있는데 연차별로 내용을 분류하였으니 업무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1년 차


 새로운 비서를 맞이한 고객님께서는 기분이 아주 좋으실 거예요. 우리 고객님께서는 전에 보지 못한 최신 기술과 능력을 겸비한 비서만을 고용하거든요. 아마 8대 후배 비서님은 최신형 자격증을 갖춘 멋진 분일 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아마 이것저것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업무를 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제일 먼저 무선 블루투스 연결 업무를 요청할 거예요. 저는 중간에 ‘스트리머’라는 이름을 가진 연결자가 꼭 필요한 조건이어야 했기 때문에 고객님께서는 불편을 가끔 겪었어요. 왜냐하면, 연결자가 가끔 아프기도 했고, 최근에는 운명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블루투스 연결하는 업무를 더는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아쉽지만, 그동안 고객님께서 최상의 만족도로 잘 사용해주셨기에 후회는 없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했고, 고객님께서 힐링을 받는다고 칭찬을 해주실 때마다 저는 온종일 미소가 떠나질 않았어요. 후배 비서님이 저보다 많은 자격증을 획득하고 오셨기에 고객님께 더 큰 만족을 드릴 수 있을 거라 기대가 됩니다.   

   

 가끔 고용센터에 후배에 대한 불만족을 토로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처음 만났기 때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서이죠. 고객님께서 생활에 필요한 조건에 맞추기 위한 최적화 과정이 필수입니다. 참, 우리 고객님은 한번 만난 인연은 끝까지 함께하는 편이라 고용 계약이 중도 해지되는 건 아닐까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우리의 고용 목적은 고객님의 최상 만족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감수해야 할 사항입니다. 고용센터에 여러 번 불려 갈 각오 단단히 되었겠죠?   



             

 # 2년 차


 이제 서로 적응이 되었기에 고객님께서도 8대 비서님에게 서서히 관심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본업을 충실히 이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고객님께서는 아마 시끄러운 상황보다는 조용한 분위기를 선호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8대 비서님은 소음을 가능한 자제하고 소리를 너무 크게 키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창문을 활짝 여는 봄이 올 때면 제일 좋아했던 소리 중 하나가 새소리였습니다. 그 새소리는 주변이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상황일 때만 고객님께 들리기 때문에 아주 귀하고 소중하거든요. 그래서 새소리를 들을 때면 그 작은 소리를 그래도 들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여기고, 자연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럴 땐 그냥 묵묵히 아름다운 새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해주세요. 고객님과 함께 자연이 주는 선물을 만끽해보시기 바랍니다. 


 무선 블루투스를 통해 이 음악 저 음악 많이 들을 겁니다. 그런데 ‘내가 니 편이 되어줄게’라는 노래를 들을 때, 혹시 고객님께서 마음이 너무 힘든 것은 아닌지 눈여겨 봐주세요. 마음이 울적하거나 지칠 때 가끔 그 노래를 찾는답니다. 최대한 담백하면서도 따뜻하게 그 노래를 들려주세요. 노랫말에 담긴 메시지로 대신 토닥토닥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 고객님, 제가 당신 마음의 이야기를 들어드릴게요.”    



            

# 3년 차 


 아마 1년 365일 쉬는 날이 없어서 지칠 거예요. 제가 이맘때쯤 매너리즘이 찾아왔거든요. 그래서 언제쯤이면 쉴 수 있을까 하소연을 하고 있을 때쯤 고객님께서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제가 없어도 혼자서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죠. 저는 휴식 시간이 길어져 너무나 편하고 실컷 잠을 잘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제 생각이 너무 짧았어요. 고객님께서 수어를 배워도 저와 함께 다양하게 소통하게끔 도왔어야 했는데 전 그저 제 휴식만 생각했거든요. 한동안 저를 찾지 않고 심지어 접근 금지령까지 내렸어요.     


  ‘아, 이제 나는 끝이 난 건가. 이렇게까지 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어떡하지?’     


  저는 고객님이 들을 수 있게 고용된 건데, 고객님이 보는 것만 찾아다니니 제가 필요가 없게 되었거든요. 저는 곧 우울증에 빠졌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까지 생겼어요.


 그때, 나의 구세주가 나타났어요. 바로 고객님의 아이들이요. 

 아이들은 고객님과 소통하고 싶어 이 말 저 말 건넸어요. 그런데 고객님께서는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는 대신 아이들에게 수어로 대화하라고 하니 아이들이 무척 슬퍼했어요. 아이들은 수어가 아직 어렵고 낯설고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아이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고객님께서 아차 싶었나 봐요.


 ‘아니,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 거지? 나는 소통하기 위해 수어를 배우고 책과 영상을 찾아서 보고 있는 건데 정작 집에서 아이들과 전혀 소통하고 있지 않잖아! 바보같이 내가 미련했구나!’     


 마음속으로 하는 이야기를 저는 들을 수 있었어요. 그 이후로 고객님께서는 저를 다시 찾아주셨고, 아이들과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저는 열심히 일에 매진했어요.


 가끔 고객님께서 비서를 찾아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어주세요. 후배 비서님을 버린 것이 아니고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우주의 세계처럼 소리 없는 세상을 여행하는 중이니까요. 여행은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잖아요. 곧 돌아오실 거고, 후배 비서님을 반드시 찾을 거예요. 왜냐하면, 고객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하고, 많은 행복을 느끼거든요. 



               

# 4년 차 


 수어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고객님께서 잘 안 들리는 것이 비서의 잘못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소리를 완벽히 구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자격증이 더 필요하다고 여겼거든요. 그런데 수어를 만나고 수어 통역사 공부를 하면서 고객님이 많은 것을 깨우쳤어요. 본인은 비서의 능력과 상관없이 들을 수 있는 한계가 명확히 존재한다는 것을요. 


 그걸 알게 된 이후로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용쓰는 대신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그걸 저와 함께할 때 알게 되어 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왜냐하면, 저는 고객님이 오해받고 소통이 단절되어 상처 받을 때마다 우는 소리를 매번 들어왔거든요. 그래서 저는 마음이 아팠어요. 아무리 애를 쓰고 더 잘 들리게 용을 써 봐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거든요. 


 그때마다 고객님이 자신을 비난하고 미워하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저도 저를 똑같이 대했어요.    

  

 ‘왜 나는 고객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어야 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는 것일까. 왜 나는 이 모양일까?’     


 이제는 그런 생각할 필요 없이 제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너무나 행복해요. 제 탓을 할 필요도 없고, 고객님도 더는 자기 비하를 하지 않거든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고,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괜찮아’ 하고 더 잘 듣지 못함에 속상해하지 않아요. 제가 고객님이 필요로 하는 소리를 들려주면 참 행복해하고, 저도 덩달아 같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후배님, 부디 자신을 비하하지 말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겠습니다. 감정은 알아차리되,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행동에 시간을 너무 뺏기지 말아요. 저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 5년 차


 이제 마지막 연차네요. 서서히 후배도 여기저기 아파질 테고 병원에 드나드는 횟수가 많아질 것입니다. 아마 이때쯤 마지막 업무를 하면서 제9대 후배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거예요. 우리의 평균 수명은 5년이니, 계약 기간도 5년인 것 알고 계시죠? 정부에서도 우리를 고용하면 고용지원금을 주는데 이 주기도 5년이잖아요. 다행히 요즘 의술이 발전해서인지 기대수명이 점점 길어져 8년째 버티는 저보다 더 오래 사실 수도 있겠네요.      

 제가 임무를 맡은 기간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어요. 고객님께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만나 정말 신세계를 맛보았지요. 저도 저랑 같은 업무를 하는 동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소통이 단절되는 아픔을 겪는 고객님을 바라보면서 제 마음도 아렸어요. 아직 세상 사람들은 수어를 잘 모르고, 대부분 입 모양이 보이는 투명한 마스크가 아닌 불투명 마스크를 착용하거든요.


 저 혼자 충분히 일을 잘 해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시각정보팀과 계속 협업해온 것이었더라고요. 후배도 시각정보팀과 함께 업무를 잘 수행하신다면 고객님께 아주 좋은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거예요.      


 고객님께서 제게 그랬어요. 제1대부터 지금까지 만난 비서들 중에 가장 다사다난한 기간을 함께 해왔다고요. 평생 느껴본 적 없었던 다양한 감정을 만나게 된 시기가 바로 지금이래요. 운 좋게도 제 선배님들께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 한마디를 저는 들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동안 수고 많았어. 부족한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해준 것 고마워. 네가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너를 만나서 나는 참 행복해. 우리 이별하는 그날까지 잘 부탁할게.”     


 우와 너무 감동적이지 않나요? 제가 그동안 5년 넘게 일해 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바로 저 말 한마디 듣는 순간이었어요. 후배 비서님도 저 벅찬 말씀 들을 그날까지 파이팅이에요!     


 참, 인수인계서라고 써놓고 제가 너무 말이 많았네요. 꼰대라고 욕하시려나요? 그래도 이렇게나마 고객님에 대해 정보를 알아두면 업무에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해서 써봤습니다. 마지막으로 혹시 이걸 보게 된다면 고객님께 이 한 마디 전해주세요.      



 “고객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저와 함께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고객님을 만나 행복했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8대 후배 비서님 잘 부탁드릴게요. 지금처럼 고객님답게 사는 인생을 늘 응원합니다. 제 최고의 고객님, 몸과 마음이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   

                                                                                      – 청각기술팀 제7대 비서 귓속형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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