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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어시인 Jun 13. 2021

봄을 봄(Seeing Spring)

저마다의 다른 봄은 모두 맞다.

#1. 봄 (, Spring)   


       

'봄' 수어 (출처: 한국수어사전)

  

 누군가는 기온이 오르면서 봄이 왔음을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뉴스로 ‘입춘’을 들으며 봄을 느낄 것이다.


 나는 자연이 보내는 시각적 신호를 바라보며 봄이 왔음을 체감한다. 예를 들면, 겨우내 햇살이 들어올까 말까 하던 안방 창문 틈으로 햇살이 빼곡 얼굴을 내밀며 인사하는 때이면, 그것은 봄이 왔다는 신호이다.     

 

 “ 안녕~? 오래 기다렸지? 내가 드디어 네 안방에 들어왔다~~ ^^ ”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반짝반짝 유리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햇빛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와 동시에 나의 미소도 빛나고, 심장에 설렘이 가득 차올라 세로토닌이 온몸에 쫙 퍼지는 행복이 떠오른다. 

     


 ‘님아, 그 패딩을 이제 보내주오.’ 


 누군가 쓴 기사의 제목이었는데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가벼워지는 어깨 무게만큼 나의 발걸음도 룰루랄라 산뜻해진다. 햇살 향기를 머금은 봄바람을 만끽하고, 살랑살랑 그 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자그마한 꽃잎들과 춤을 추는 꿀벌들 모두가 너무나 그리웠다.     


 회색빛이 가득한 어두운 겨울 터널을 지나 마침내 눈부시게 빛나는 봄 길을 마주 보는 기분이란 무엇일까? 내가 어릴 적 최애 간식이었던 치토스 과자봉지 속에 ‘한 봉지 더’라고 쓰여 있는 쿠폰을 연속으로 2번이나 봤을 때만큼 짜릿하고 입 안 가득 행복을 머금은 것과 같았다.     


 2020년 11월 몹시 추운 겨울 어느 날, 문득 목련 나무를 바라보는데 앙상하고 평평한 선이던 가지 중간이 볼록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새순이 나려고 준비하는 것 같아 언제쯤 볼 수 있을지 기대가 되어 내내 기다렸지만, 영 소식이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겨울을 보냈다. 그렇게 나의 기다림이 지쳐 무관심으로 바뀌어 가던 중 다시 나무를 찬찬히 살펴보니 아주 조그마한 새순을 가지 밖으로 수줍게 내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올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우며 매일 묵묵히 자기 속도대로 새순을 내밀고, 꽃봉오리를 피우더니, 결국 순백의 우아함을 가득 안고 목련 꽃을 활짝 피워내는 것이 아니던가.      


 아, 그대처럼 나도 나만의 속도로 그냥 살아가면 되는 건데. 뭐가 그리 급하고, 무엇이 그렇게 걱정이 되어 쫓기듯이 살아왔던 것일까? 나도 자연 속의 소소한 아주 작은 존재일 뿐이라, 그저 자연스럽게 자연을 따라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 섭리를 왜 이제 알았을까. 누군가는 그 목련 나무를 향해 왜 그렇게 추운 겨울에 꽃 피우려고 사서 고생하냐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 다른 꽃들처럼 따스한 봄에 빨리 새순 피워서 꽃봉오리 내밀고 꽃 피우면 되지 않느냐면서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그 아무도 목련 꽃에 그런 말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냥 원래 그런 꽃이려니 하고 수용하고 인정한다. 왜 너는 그렇게 느리게 꽃을 피우느냐고 독촉하지 않는다.      


목련 꽃이 원래 그런 존재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듯이, 나 또한 난 원래 이런 사람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된다. 억지로 남에게 맞출 필요도, 나를 잃어가며 자연스러운 모습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봄은 그렇게 매번 찾아와서 나에게 이렇게 토닥토닥 묵묵히 위로를 건네준다. 봄이라는 수어처럼 봄은 내 뱃속까지도 따뜻하게 안아준다.      




#2. (, Seeing)            


  

'보다' 수어 (출처: 한국수어사전)


 

 짜~잔~! 하고 나타난 봄 햇살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봄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임에 참 감사하고 소중히 여겨진다.     


 쑤~욱~! 하고 고개를 내미는 들꽃들이 온갖 애교를 떨며 벌들을 유혹하고, 꽃들과 재미난 대화를 하는 나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저 나비들처럼 훨훨 날아올라 이 꽃 저 꽃 돌아다니며 봄꽃 도장 깨기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인간 세계에서 알지 못하는 저 자연 속에서 어떤 신나는 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궁금하고 말 걸어보고 싶지만, 난 그저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 속에서 나의 마음을 보고, 나의 관점을 되돌아보고, 자연을 통해 새로운 지혜를 배운다.     

봄은 내게 다채로운 볼거리를 가져다주는 소중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다. 


‘봄을 봄(Seeing Spring)’


 말 그대로 나는 봄을 봄으로써 봄이 왔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고, '봄'이 보여주는 자연을 통해 나는 '바라봄'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 행위인지 다시 한번 일깨우는 시간을 가진다.     

 

 봄이라는 계절 자체는 사실 뚜렷한 형태나 시점의 경계선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사람마다 느끼는 봄도 다를 테고, 지역마다 봄의 시점이 다를 테고, 어느 나라는 봄이라는 계절 자체가 아예 없기도 하다. 다만, 꽃잎의 피어남을 통해, 벌들의 분주함을 통해, 온도계의 빠알간 수은주가 올라감을 통해, 패딩 잠바를 탈의함을 통해, 달력의 넘김을 통해 등등 각자 다양한 기준을 통해 저마다의 봄을 맞이하고 있다. 


누구의 봄은 맞고 누구의 봄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정답도, 오답도 없이 봄은 그냥 봄이다. 모두 다른 각자의 봄은 다 맞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없는 봄도 맞는 것이다. 다르기도 하고, 없기도 한 봄은 그저 그렇게 우리에게 존재한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보는 것도 기준과 편견이 없어야 할 것인데 왜 유독 사람에 대한 바라봄은 엄격하고 획일화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일까? 다수는 무조건 맞고 소수는 틀린 것인가? 소수자로서 보는 사람의 침묵은 오답이고 잘못된 상식인 것인가?     

 

나는 나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내가 나를 ‘보는 사람, 시인(視人, Seeing Person)’이라고 생각하는데, 과연 맞는 것일까? 봄이라는 계절 속에 나타나는 자연은 그대로 수용하면서,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속한 세상을 본다고 할 때 온전히 나의 생각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아니면 학습된 기준과 편견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질문을 내던지고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답은 역시 없었고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내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볼 것인지 더더욱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수년간의 자아 탐색과 질문을 내던진 끝에 확실히 알게 된 내용은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내게 편안함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언젠가 나이가 더 들고 시력에 노화가 찾아온다면, 나는 어떠한 불안감을 또 만날지 걱정이 앞서지만 최대한 많이 보면서 살아가고 싶다.     


 볼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함께 공감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누군가 나처럼 불편한 장애를 겪고 있어 불편함과 절망감을 느낀다면, 한 마디 조심스럽게 건네주고 싶다.     


‘그대는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에요. 더 많이 볼 수 있고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그대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대단한 사람이에요!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봄(Spring)이 존재하고, 그 봄을 어떤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주가 무한대로 펼쳐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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