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미루지 말 것, 그리고 주어진 시간을 끝까지 살아낼 것.
오늘 오랜만에 친한 분과 점심을 먹으며 새해 덕담을 나누던 중에, 그분의 휴대전화로 문자한통이 왔다. 1년전에 암진단을 받으시고 힘겹게 암투병을 해오시던 친한 지인의 부고 소식이었다. 우리는 정신없이 장례 날짜와 장소를 확인하며 말문을 잃었다. 서둘러 점심식사를 마무리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에게도 두번의 이별 경험이 있다. 아빠와 큰언니다.
아빠는 교통 사고로 어느 한순간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무런 예고도, 작별의 시간도 없이 벌어진 이별이였다. 아침까지 분명히 살아 있으셨던 분이 그날 저녁에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은 현실이라기보다 믿을 수 없는 오류처럼 느껴졌다. 6살이였던 나에게 아빠의 죽음은 슬픔 이전에 ‘부재’였고, 그래서 애도조차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4년전 큰언니의 이별은 정반대였다. 13살에 급성신부전으로 두 개의 신장을 잃은 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두번의 이식 수술과 투석을 오가며 살아냈다. 언니의 삶은 늘 병원과 함께였고, 가족의 일상 역시 그 리듬에 맞춰 흘러갔다. 우리는 언젠가 올 이별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래 지켜보는 이별은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기보다, 조금씩 닳게 했다. 언니는 끝까지 잘 버텼고, 우리가족은 곁을 지켰지만, 떠나는 순간의 허무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빠의 죽음은 삶이 얼마나 갑작스럽게 끝날 수 있는지를 가슴 절절하게 가르쳤고, 언니의 삶은 어떻게 끝까지 살아내는가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 하나는 ‘지금’을 놓치지 말라는 경고였고, 다른 하나는 고통 속에서도 삶의 존엄을 잃지 말라는 증명이었다.
큰언니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달이 지나, 엄마와 전화로 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갑자기 떠난 아빠와, 오랜 투병 끝에 떠난 언니 중에, 어떤 죽음이 더 힘든 것 같애?"
이 두개의 이별을 함께 경험한 가족이라 물어볼 수 있는 어리석을 질문이였다. 엄마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무슨 죽음이 더 좋고 안 좋은 게 어디 있니. 떠나고 남은 사람이 제일 힘든 거지.”
맞다. 죽음의 방식에는 우열이 없고, 잔인함의 정도도 없다는 것. 남겨진 사람은 어떤 이별 앞에서도 같은 무게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 아빠의 갑작스러운 부재도, 언니의 긴 투병 끝의 죽음도 결국 엄마에게는 같은 상실이었다.
그 말 이후로 나는 죽음을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죽음은 떠나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의 시간이라는 것을.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고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된다.
아빠는 갑작스러운 이별로 오늘의 소중함을 남겼고, 큰언니는 긴 삶으로 끝까지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어떻게 항상 에너지가 좋아?”
속으로 나는 그분들에게 말한다. 이 두 가지 이별을 직접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당신도 알 거라고. 내가 사는 오늘이 얼마나 선물인지. 내가 언제 내 주변 사람들과 이별할지 모르고, 또 남겨진 사람들이 겪는 마음의 무게를 언제든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세상을 떠난 뒤 남겨질 가족들, 주변 사람들, 그리고 나와 조금이라도 인연을 이어갔던 사람들에게 단 한 가지라도 따뜻한 기억으로 남고 싶다. 나와 함께한 시간이 짐이 아니라 힘이 되었기를, 떠올릴 때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아빠와 큰언니와의 이별의 방식은 달랐지만, 우리 가족에게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삶을 미루지 말 것,
그리고 주어진 시간을 끝까지 살아낼 것.
남겨진 우리는 여전히 아프지만,
그 아픔 위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또 인생이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모든 분들게 깊은 위로와 평안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