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친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한동안 연락을 못 했던 터라 반가움에 전화를 받지만 친구의 건조하다 못해 쩍쩍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 하냐?”
“그냥 있지. 왜 무슨 일 있어?”
“나 헤어졌다. 있다 보자.”
“또?”
“이번엔 진짜야. 있다 보자.”
“그래 알겠어.”
말은 알겠다고 했지만 과거에도 수없이 헤어졌다 다시 만나고 있는 터라 난 그저 ‘또 한 번의 바람이 부는구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지자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평소에 자주 만나던 아주대 근처의 술집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한 그 친구는 연신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역시나 건조한 말투로 “왔냐?”라고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 주길 바라서 일까? 일단은 간단히 안주와 소주를 시켜 한잔 주거니 받거니 하며 녀석의 동태를 살핀다.
아니다 다를까 짜증 난다며 그 친구의 입에선 줄줄이 그간의 여자 친구와 싸웠던 일들이 세세하게 묘사된다.
철저히 그 녀석의 입장에서.
한참을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난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일단은 그 녀석의 편으로서.
그리고 중립적인 입장으로 친구의 여자 친구의 입장에서 다시 사건을 재구성하며 이야기는 나눈 결과. 친구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그건 그렇다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일전에도 그 이전에도 늘 같은 패턴이었다.
그렇게 술자리는 늦게까지 이어졌고 결국 그 친구는 여자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장문의 메시지를 남기게 되었으며 다음날 극적인 화해를 끝으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헤어진다는 일. 서로의 인연을 정리하고 각자의 길로 돌아선다는 선택. 아마 내 친구는 헤어지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으리라. 그렇지만 화가 났었던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생각했던 일들을 3자의 입장에서 들었을 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을 것이다. 나 역시 과거에 연인과 숱하게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반복으로 주변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내게 건네는 위로와 안도의 반복 속에 그들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야 생각해 보면 그때의 행동들은 경솔했던 것 같다. 순간의 욱하는 기분으로 그간의 인연을 정리했다고 믿었건만 화가 났던 순간이 지나가고 마음이 잠잠해질 때면 슬그머니 '내가 너무 했었나?'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던 것이다.
어디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화가 났을 때 한 행동은 늘 후회하기 마련이라고. 그 이후로 난 연인과의 다툼이건 동료들과의 언쟁이건 화가 났을 순간은 그 어떤 판단도 유보한 채 일단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본다. 얼핏 보았을 땐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당시 서로의 감정이 극으로 올라가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기에 급급할 뿐 그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는가.
한 발자국 떨어져서 생각해볼 일이다. 그 일이 정말 화가 나는 일인지.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한 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 훗날 선택으로 인해 자신이 괴롭지 않으려면 별다른 도리가 없지 싶다.
그러니 친구야 앞으로는 한 번 더 생각해 보길 바라.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을 위해서. 나중에 되돌리고 싶기엔 너무 늦어버리는 순간이 오게 된다면 너만큼 나 역시 슬퍼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