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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문 Nov 29. 2021

바다의 시간이 담긴 비닐봉투 속 물건

서귀포 노지 문화탐험대 체험기

 지난 6월 육지에 사는 지인들이 아이들과 놀러 왔다. 동네 앞바다 산책을 나갔던 그들이 신나서 돌아왔다. 한 봉지에는 작은 문어 두 마리, 또 다른 한 봉지에는 삶아서 다섯 개 이상 먹지 말라했다는 소라 비슷한 것이 들어있었다. 동네 항구에 나갔다가 물질하고 들어온 해녀들을 만났는데 궁금해서 말을 붙였다가 칠천 원에 주신다는 문어를 너무 좋아서 만원을 드리고 왔다고 했다. 난 장난 섞인 말을 했다.

“시세 조장하지 마. 달라는 데로 드려.”

그때는 문어가 칠천 원이든 만원이든 상관없었지만 해녀들이 쉽게 잡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확실하다.


  ‘어멍 탐험대’라는 이름으로 ‘노지 문화탐험대’를 신청했다. 해녀를 알아보겠다는 활동 계획서를 제출하고 보니 좀 막막하기는 했다. 오다가다 만날 수 있는 것이 해녀인 줄 알았지만 작정하고 만나려니 쉽게 만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해녀들은 특정 작업시간이 없었다. 어디로 몇 시에 가면 만날 수 있는지 우리가 해녀가 아닌 이상 일급 기밀 이상의 알기 어려운 정보였다. 대원들 각자가 사는 마을과 가까운 바다에서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항상 오가던 바닷길이 이제는 해녀를 찾기 위해 기웃거리는 길이 되었다. 우리 대원중 가장 제주 이주기간이 길었던 대원이 신산리 해녀들이 모이는 시간과 장소를 알아냈고 방문 허락을 받았다. 아이들을 등교시키자마자 냉큼 달려갔다. 바닷가에 가면 인적이 없어 보이는 건물들이 하나씩 있는데 그곳이 해녀 쉼터였다. 처음 내부를 들어가 보니 동네 할머니들이 이미 많이 모여 계셨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제주 방언이 난무한 속에 인사를 드렸고 가장 가까운 할머니에게 말을 붙였다. 여덟 살이 되면서 어멍 따라 물질을 배웠고 그때는 다들 그렇게 했다는 얘기에 오래된 서글픔이 묻어났다. 제주에 태어난 바닷가 여자는 날 때부터 해녀인 것이다. 좋고 싫고 생각할 것도 없이 해녀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처음 만난 해녀의 이야기는 모든 해녀의 이야기였고 해녀를 떠올릴 때마다 곱씹어 보게 되었다. 바다에 파도가 심해서 해녀들이 모여서 기다리다가 물질을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비가 오락가락하던 날 기다리던 해녀들이 바다로 들어갔다. 여전히 파도도 있고 비까지 오는 날이었지만 성게 작업을 마무리한다고 했다. 성게를 먹을 때마다 그날 바다에 선 해녀가 생각날 것 같았다.


  지난번 지인들이 만났다는 우리 동네 해녀를 만나려고 여러 차례 가보았다. 해녀 쉼터에는 항상 검은색 천막이 내려져있어서 왠지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이사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해녀도 아니니 당연한 것이었다. 어느 날 새벽 운동을 나갔다가 잠수복을 입고 바다에 앉아계신 해녀를 만났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붙였다. 40분 정도 쭈그리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 동네 해녀들과 해녀회장님이 와야 같이 물질한다고 기다리고 계셨는데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몇 시쯤 만나세요?”

“지금 몇 시야? 올 때 됐지게”

시계도 핸드폰도 없이 기다리고 계셨다. 해녀들이 아는 바다의 시간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함께 기다리다가 난 돌아갈 시간이 되어 오후에 다시 와보겠다고 하고 집으로 향하는데 그제야 스쿠터 일곱 대, 트럭 한 대에 해녀들이 지나갔다.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해녀 카리스마가 나를 사로잡았다. 서둘러 오전 일을 마치고 바다로 다시 가보았다. 바다에서 막 나온 해녀가 ‘어휴’ 하며 내뱉는 숨이 옆에서 지켜보기 민망했다. 몇 마디 건네지도 않아 얼마 전 사고로 돌아가신 남편 이야기를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맘이 힘들어 끼니도 제대로 못 드신다고 했다. 듣는 우리들의 얼굴도 함께 일그러졌다. 부끄럽게 두유를 건네고 잘 챙겨 드시라고 했다. 너무나 고맙다며 걸어가셨다. 되려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것은 우리였다. 물질을 마친 해녀들이 한분씩 나오고 짐 나르기를 도와드렸다. 옷 젖는다고 사양하는 보말이 담긴 테왁을 어깨에 졌는데 오전 내내 바다에서 보낸 시간치고는 가벼웠다. 오전에 보말 값을 들었던 탓인 것 같다. 물질을 마친 해녀들은 걸어가기도 하고 타고 온 스쿠터를 타고 가기도 했다. 차도 없고 오토바이도 없는 해녀의 테왁을 내차 트렁크에 싣고 쉼터로 모셔다 드렸다. 드디어 입성하게 된 우리 동네 해녀 쉼터였다. 해녀 회장님께서 무심하게 내민 문어 한 마리와 소라 세 개를 받았다. 내 차에 탔던 해녀께서 고맙다며 동행한 일곱 살 딸에게 지폐 한 장을 건네셨다. 항상 내려져있던 해녀 쉼터의 검은색 천막이 나에게도 열렸다.


  해녀를 따라 바다에 가고 싶지만 생초보인지라 교육을 받기로 했다. 해수욕장에서 발장구 좀 쳐봤다는 우리는 무모하고 용감하게 해녀체험에 도전했다. 해녀를 만나면서 다시 만나게 된 바다는 한여름 놀이터가 아닌 해녀의 터전이었다. 원래 남의 땅에 들어갈 때는 공짜가 없지 않나. 역시나 쉽게 우리를 허락하지 않는 바다였다. 해녀들이 입는 고무 잠수복 대신 다이빙 슈트를 입고 해녀 수경 대신 스노쿨 링 마스크를 착용했다. 물속에서 장시간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입는 잠수복은 입기부터 난관이었다. 물이 들어가지 않기 위해 몸에 꼭 맞는 것을 착용한다. 뻣뻣하고 꼭 쪼이는 불쾌한 느낌과 씨름을 하다 보면 그제야 잠수복 속에 몸이 들어가 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허리에 웨이트라 불리는 납 덩어리 벨트를 찬다. 오리발보다 더 긴 핀까지 착용하고 나면 완벽한 착장이 된다. 해녀의 다이빙은 무호흡 다이빙이다. 수중 호흡을 도와주는 장비 없이 수면에서 폐에 가득 숨을 들이쉬고 호흡을 정지한 상태로 다이빙을 한다. 물속에서 호흡하지 않는 시간이 길수록 상군, 중군, 하군 해녀로 나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하군중에 똥 군에 속합니다. “

강사님의 우스개 소리에 모두 깔깔거렸지만 바다에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잠수는커녕 몸이 가라앉지도 않아 버둥거리고 몇 초만 숨을 참아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이걸 칠십이 넘은 해녀들이 한다고?’ 우리가 만났던 해녀들은 연세가 칠십을 바라보거나 칠십이 넘은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납 2킬로를 차고 바다에 들어갔지만 해녀들은 7킬로 정도를 찬다고 했다. 잠수복의 부력 때문에 수심으로 가려면 더 많은 무게를 허리에 차지만 그만큼 수면으로 올라오는 시간이 길어진다. 어쨌든 첫 다이빙은 다이빙이 아닌 살기 위해 버둥거리기였다. 여러 차례 연습 후에 실력이 조금 나아져 바다에 들어가면 눈앞에 뿔소라도 보이고 성게도 보였다. 그사이 처음 가졌던 무모함과 용감함은 바다로 잘 보내고 침착함과 기다림을 얻었다. 해녀회장님과 나눴던 대화 중 떠오르는 말이 있다.

“물건(해녀들은 소라, 성게 등 채취물을 일컫는 말)이 눈앞에 있어도 숨이 충분히 남았을 때 올라와야지 욕심내면 큰일 치러.”  

더불어 욕심내지 않는 마음을 얻었다.


  “야!”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해녀 회장님이 지나가다 내차가 있어서 불렀다며 상추며 밀감을 나눠주셨다. 또 다른 날은 내가 회장님 집 앞을 지나다가 커피 마시고 가라는 말에 믹스커피 한잔을 얻어마셨다. 언제 물질 가시는지 보조로 따라가겠다고 다이빙 연습 중이라는 말에 코웃음을 치시지만 불러준다는 말에 난 여전히 신이 났다. ‘어멍 탐험대’ 전에는 마을에 해녀가 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동네에 오가는 할머니들이 해녀라고 생각도 못했다. 이제는 이웃에 어느 집에 해녀가 사는지 알고 그녀들도 나를 안다. 칠천 원이 아닌 만원에 사 왔다는 문어가 다시 생각이 난다. 낯선 여행자에게 건넨 바다의 시간이 담긴 비닐봉투 속 물건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시간 다이빙하는 동안 뿔소라 한 개를 잡았던 나는 해녀의 물건들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 담겨있음을 안다. 쌀쌀한 날씨에 뜨끈한 보말칼국수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등에 지고 가벼웠던 테왁이 떠오른다. 오랜 시간을 바다에서 지낸 해녀들의 마음이 푹 끓여낸 보말칼국수처럼 온몸을 덮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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