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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문 Nov 22. 2021

괜찮다고 말하지 않기

이혼을 마음먹고 집을 얻어 나오긴 했는데 여전히 생활비를 받아야 하고 남편과 통화도 해야 했다. 남도 남편도 아닌 상태의 관계는 함께 살 때와는 또 다른 피로감이었다. 서로가 덜 피곤하게 협의이혼을 할 건지 아니면 돈도 들고 시간이 걸려도 소송으로 할 건지 결정을 해야 하는데 통화는 항상 논점을 벗어나서 뜯기고 발개진 상처만 계속 건드릴 뿐이었다. 남편은 이혼만 안 하고 내가 대충 참고 살기를 바랐다. 남의 이목이 더 중요하니 4인 가족 형태를 유지하고 싶지만 남편이나 아빠로 살지는 않으려 했다. 피할 수도 없이 매번 통화하고 나면 진이 빠졌다.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사람으로 아이들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다가도 전화 한 통 받고 나면 매번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숱한 모욕과 협박의 말들에 대책 없이 너덜너덜해졌다.

항상 내 곁엔 아이들이 밀착되어 있었다. 이사 온 것 까지는 잘 설명했지만 때때로 무너지는 마음이 들킬까 봐 들켜서 아이들에게 자국을 남길까 봐 나를 단속했다. 아이들이 잠들면 잠시 나를 쉬게 했다. 딱히 무엇이 하고 싶거나 하지 않았다. 잠을 자는 것이 쉬는 게 아니라 혼자 깨어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낮동안 꽁꽁 싸매었던 감정의 응어리들을 매일 잘 보내야 했다. 그것들이 계속 쌓이면 어느 날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있는 내가 싫었다. 난 그 시절 나를 하고 싶은데로 내버려 두고 싶었다. 뭐라도 너를 달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술을 마셨다. 내 마음속처럼 비좁은 골목을 지나 시원한 밤공기 속으로 술 봉지를 들고 걸어오면서 이 날들이 얼마나 길어질까 생각했다.

어렵고 힘든 모습을 들키면 상대가 없는 싸움에서 지는 것 같았다. 늘 문제가 없어야 하고 괜찮아야 하고 혹시 힘들어도 얼른 일어나 툭툭 털고 더 잘하는 모습을 보여야 잘 사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항상 엄마에게 ‘힘든 일이 있습니다’ 하는 말을 못 하고 ‘잘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요’라고 했다. 가을날 발에 밟히는 떨어진 은행잎처럼 엄마의 길엔 늘 걱정이 깔려 있었다. 내 걱정까지 나누자고 할 수가 없었다. 나눌 수가 없으니 없는 것처럼 아닌 것처럼 살기를 택했었나 보다. 없는 척해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몸집을 불려 어느 날 큰 한방으로 다가왔다. 부실공사에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듯이 나를 잘 쌓아 올리지 못한 탓이었다.

결혼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남편이 두 번의 이혼한 과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알았을 때 속인 것은 화가 났지만 과거를 문제 삼아 결혼을 깰 용기가 없었다. 괜찮을 거라고 지난 일이니 남편이 달라질 거라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나를 다독였다. 문제 삼지 않았지만 남편은 문제를 계속 만들었다. 그때도 괜찮지 않다고 했어야 했다. 깨어있는 밤 나에게 ‘괜찮아 잘할 수 있어’라고 해줄 수 없었다. 정말로 괜찮지가 않았다. 힘든 건 힘든 데로 바닥까지 찍어봐 하고 포장한 관대함이 유일하게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술을 마실 명분을 만들어 덜 괴로워지고 싶었다. 어디까지 힘들어질지 바닥을 보고 싶었다. 좀 그래도 될만한 일을 겪고 있는 중이니까 나에게 만이라도 솔직하게 ‘괜찮아’가 아닌 ‘힘들어’를 하고 싶었다. ‘이제 됐어’가 나올 때까지 술을 마시더라도 내버려 두자고 했다 이제라도 괜찮지 않은 너를 마음껏 내놓고 바닥을 찍으면 거기서부터 다시 쌓으면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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