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는 곳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갈 때는 고민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이주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아이들과 제주를 자주 오갔고 올 때마다 습관처럼 마을을 둘러보고 빈집을 찾아보고 초등학교에 가보기도 했다. 바로 이사 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운명의 집을 만나는 명분이 생겨 끌려라도 오고 싶었던 것 같다. 운명의 집은 없었고 제주여행이 끝날 때쯤은 이주의 열망도 조금 식혀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육지로 돌아가는 배안에서 우연히 60세가 넘어 보이는 여자 여행객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우린 둘 다 제주에 여행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고 이주할 생각이 있고 집을 알아보는 정보를 나누게 되었다. 도착항에 내려서 팽목항으로 목적지를 잡아 같이 이동하고 하룻밤을 같은 숙소에서 보냈다. 난 공동육아로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했고 그녀는 거제도에서 혼자 사는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 이주를 계획 중인 이야기를 했다. 비슷하게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 둘 중 먼저 제주에 정착하는 사람이 연락을 하기로 하고 팽목항에서 헤어졌다.
육지로 돌아와서 이주 대신 남편과 별거를 시작했다. 매일 따뜻해지는 기온이 봄을 알리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시린 겨울 끝에 있었다. 별거와 이혼 중인 남편은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이들을 데려가겠다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욕이 섞인 비아냥 거리는 말들을 했었다. 그중 가장 듣기 힘들었던 말은 나에게 자살을 하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오랫동안 돌덩이가 되어 나를 짓이겼다. 이혼 협의도 소송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경제활동이 없는 나는 불안감이 들고 상황을 밀고 나갈 힘도 없는 비참함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추석을 앞두고 팽목항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여름에 이주를 했고 추석에 아무도 오지 않으니 아이들과 놀러 오라는 연락이었다. 별거한 딸이 사는 곳을 와보고 쓰디쓴 표정을 지었던 친정엄마에게 미안해서 명절에 가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는 차라리 모르는 남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이들과 제주에서 추석을 보내기로 했다. 첫째 날 밤 그녀는 젊은 시절 운동권이었던 남편과 헤어지고 아이 둘을 키운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서사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 오랜 시간 남편으로부터 받은 고통을 이야기할 때 그녀의 얼굴은 다른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잠시나마 부부의 연을 맺었던 사람이라서 더 악을 쓰게 하는 고통이 생생히 느껴졌다. 살을 비비고 아이도 낳은 사이가 남보다도 못한 악연이 될 때 시간을 통째로 부정하고 싶어 진다.
내 사정을 모르는 그녀가 하는 말들은 나에게 어떤 메시지 같았다.
‘힘들었던 시절이 지나가니 아이들도 크고 나도 살아졌어. 살아지더라.’
잠들지 못하고 새벽 내 뒤척였다. 동이 틀 무렵 그녀가 자전거를 타러 가자고 했다. 5살, 7살 아이들은 자다가도 엄마가 없으면 잠을 깬다. 다행히 그날 아침은 달랐다. 매일 자전거를 탄다는 그 길을 함께 달렸다. 주책맞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할 수 있는 일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첫째 아이 일곱 살이 될 동안 나만의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방전이 되어가는 나를 충전할 방법이 없었다. 늘 허덕이고 지치는 날들에 남편은 일을 보탰다. 남편도 아이도 모두가 먼저 자기 일을 해결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낮에는 식모, 유모처럼 살고 밤에는 성 노동자가 되었다.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온 남편은 아이들 재우다 잠이 든 나를 아무렇지 않게 깨웠다. 술냄새 음식냄새 알수없는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밖에서 못다한 것을 풀듯 나에게 성노동을 강요했다. 성관계를 하든 안 하든 잠 못 드는 찝찝한 밤이었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살게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아침에는 혼자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혼자 달리니 잠시 다 잊을 수 있었다. 원래의 내가 된 것 같았다. 밭길 사이를 지나 해안도로로 들어가 어제 쉬었던 그 자리에 자전거를 세웠다. 오는 동안 아무도 없었고 여전히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오직 바다와 나만 마주한 채로 반복되는 파도에 내 오래된 불쌍한 마음을 불러보았다. 꺼낼곳이 없어 주저했던 나를 흐느끼며 불러보았다. 여기 오면 내가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여러 차례 오가면서도 답을 낼 수 없었던 것을 이제야 찾게 되었다. 종종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내가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의 답을 얻을 때가 있었다. 그녀도 마치 미래에서 온 메시지 같았다.
‘네가 하고 싶은데로 살아봐!’
3년이 지났고 제주에 살고 있는 나도 누군가에게 메시지가 되면 좋겠다. 내가 남편에게 지쳐서 집을 떠나 머물 곳을 찾았을 때 낯선 곳의 반가움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거창하게 멋진 말을 건넨 것은 아니었지만 네가 하고 싶은데로 살아봐도 된다는 희망을 주었다. 이른 아침 바닷길을 달릴 때면 자전거 타던 지난 내가 나의 등을 두드리고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