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여, 안녕

by 민들레

한밤중에 자다 깨어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나왔다. 냉장고 문을 열면서 주방 바닥을 살폈다. 얘가 혹시 오늘은 나오려나? 내가 기다리는(?) 것은 엄지손톱 크기의 검은 벌레 한 마리였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놈은 날개 달린 바퀴벌레가 아닌가 싶다. 녀석을 대낮엔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밤중에 주방으로 나오면 그때 나타나곤 했다. 놈과 처음으로 마주쳤을 때, 녀석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두 번째 마주쳤을 땐 나는 녀석이 주방 바닥을 배회하는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널 좋아하지 않아.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세 번째 나를 만난 녀석은 이제 마음을 푹 놓는 듯했다. 내 앞에서 천천히 왔다 갔다 하면서 여유를 부리는 것이 나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그래, 내가 너를 해칠 마음이 없는데 네가 나를 싫어할 이유가 없겠지. 부탁인데, 제발 네 가족들까지는 데려오지 말아 줘. 그 뒤로는 녀석을 볼 수가 없다. 녀석이 내 집을 완전히 떠났을까? 오히려 궁금해진다.


예전 같으면 나는 벌레를 보자마자 기겁을 하며 벌레 몸에 에프킬라를 뿌리거나 휴지로 집어 변기통에 넣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놈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바퀴벌레의 ‘왕초’가 아니던가. 물론 우리 집엔 바퀴벌레는 없다. 없는데, 왕초가 둥지를 틀었으니 머잖아 그 일족을 거느리고 올까 봐 걱정되었다. 그런 만큼 왕초를 잡아 변기통에 넣어버리면 근본을 제거하는 일이 될 테니 예전의 나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살아있는, 꿈틀거리는 것의 생명을 해칠 마음도 용기도 없다. 그런 이유로 몇 년 전 여름부터는 모기 잡는 일도 꺼려졌다. (유난 떤다고 할까 봐 이런 말은 안 하고 싶지만 글의 맥락상 어쩔 수가 없다.)


요즘에도 밤에 잠자리에 들면 머리맡에서 모기가 윙윙거릴 때가 있다. 팔이나 다리를 물리기도 한다. 좀 물리면 어떤가? 모기는 내 피로 배를 채웠지만 내 건강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물린 부위의 가려움도 길어야 이틀이다. 이렇게 마음먹으니 모기가 달려들어도 피하려는 몸짓도 성냄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날 일어나 보면 일부러 잡지 않았어도 스스로 생을 마친 모기가 방바닥에 떨어져 있곤 한다.


그 벌레도 수명이 다해 어느 구석에서 생을 마감했을까? 그랬을 것 같진 않다. 녀석은 그때까지 매우 팔팔했다. 아무튼 녀석이 사라져 줘서 고맙다. 그리고 좀 엉뚱할지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녀석은 내가 미워하거나 해치려는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나를 위해 스스로 사라져 줬다고. 사람과 미물의 관계였지만 마음과 마음이 통했다고 한다면 좀 우습긴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