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잃은 잠자리

by 민들레

보도 위에서 잠자리 한 마리가 파닥거렸다. 자세히 보니 잠자리 날게 한 개가 없었다. 아이들이 생물학습체험용으로 잡아서 조몰락거리다 팽개친 걸까. 네 날개 중 한 개만 흔적 없이 떼어진 것이 사람 손을 탄 게 틀림없어 보였다.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은 다 소중하다. 아이들이 그걸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다.

날지 못하는 잠자리를 그대로 두면 오가는 발길에 밟힐 게 뻔했다. 마침 도로 옆이 풀숲이어서 잠자리를 그곳에 옮겨주려고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런데 가느다란 발로 내 손가락을 붙잡은 잠자리는 도통 손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 손이 익숙한 건지 아니면 겁에 질려 뭐든 붙잡으려는 안간힘인지, 그 덕에 나는 손바닥 안의 잠자리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머리와 등이 파란 왕잠자리였다. 말 그대로 곱디고운 한쪽 편의 날개 두 개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반편 반대편 날개는 한 개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나머지 한 개도 반쯤 뜯겨나간 상태였다. 다리 개수도 모자랐다. 그나마 몸통에 상처를 입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잠자리가 다시 건강해질 수 있을까.

나도 한 때 날개를 잃은 적이 있었다. 한 개가 아니라 날개 전체를 잃은 듯한 절망감으로 고통스러웠다. 그 시절을 극복 가능하게 한 요인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홀로 사막 한가운데에 내던져졌다고 느낄 때, 그 현실을 빠져나오든가 포기하고 모래바람 속으로 파묻힐 것인가는 오직 자신에게 달려있다. 이것은 심리적 상태이든 물리적 환경이든 마찬가지다.

당시 나를 살리는 길은 오직 나 자신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를 일으켜 세워야 했고 그럴 만큼의 인내와 의지력이 내 안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다”라고 한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나를 나 이상으로 착각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살아내야 했기에, 아마도 나 이상이기를 소망했던 것 같다. 나에 대한 신뢰가 아니었다면 십중팔구 무력감과 우울이라는 밑바닥으로 추락했을 테고, 자신감이라는 심리적 자원을 지니지 않았다면 나는 바로 무너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사코 내 손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잠자리의 몸에 더 이상의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풀숲에 가만히 놓아주었다. 나는 너를 도와줄 수가 없어. 네가 살 곳은 이곳이야. 네 스스로 살아나야 해, 라는 말을 입속으로 하면서였다.

잠자리의 날개가 다시 자랄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잘린 날개를 영원히 회복할 수 없다면 반쪽 날개로만 세상을 살면 된다. 날 수 없는 까닭에 풀잎 위를 기어 다니고 흙속을 더듬으며 낯선 세상과 만나게 될 것이다. 네 날개를 펴고 땅 위를 날기만 할 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 말이다. 사라진 날개가 다시 돋아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과거를 빨리 털어야 새로운 희망을 심을 수 있다.


리처드 바크는 소설 <갈매기의 꿈>에서 “애벌레에게는 삶의 끝일 수 있지만 그것이 나비에게는 삶의 시작일 수 있다”라고 했다. 너무 아프겠으나, 날개 잃은 잠자리도 이 말을 기억했으면 싶었다. 어느 날 갑자기 두렵고 불안한 삶 속으로 던져졌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생소한 환경과 마주해야 한다. 잠자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반쪽만 남은 자신의 날개를 사랑하는 한편 하늘이 무너져도 극복해나갈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보면 어느새 흙 위를 기어 다니는 삶에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반드시 온전한 날개가 있어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삶의 형태와 관계없이 모든 곳에 행복은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치관을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뿐이다. 나는 푸른 왕잠자리를 믿었다. 반쪽 날개에 적응하고 땅 위를 오가며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을 것 같다. 어쩌면 지금쯤 새 날개가 조금씩 돋아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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