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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공존

아버지의 노래 5

by 민들레

상 무식자처럼 행동하며 이빨도 안 닦고 더럽게 하고 다녔다.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TV 사극 드라마에서나 들을법한 얘기를 나는 아버지 입을 통해 듣고 있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거짓 미치광이나 바보행세를 했다는 역사 속의 인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나의 아버지가 그런 분이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했다. 아니 머리가 멍한 것이 실감이 안 났다.

“신분을 숨기려고 피해 다니면서 무식한 척 바보짓하니 사람들이 내가 정말 바보인 줄 알고 놀려대더구나. 나중엔 일부러 사상을 숨기려고 김일성 욕을 먼저 하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 젊은 날의 히스토리에 대해 알지 못한다. 다만 아버지가 노년에 들어서야 조심스럽게 하셨던 몇 마디의 말들로 미루어 짐작하고 유추할 뿐이다. 일제치하에서 벗어났지만 좌우의 이념대립이 심화되어가던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아버지는 사회주의 사상을 지니셨던 것 같다. 당시 아버지는 이승만 단독정부를 원하지 않았으며, 몽양 여운형선생을 흠모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여운형선생의 연설에 감복했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들은 기억이 난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였으며, 해방정국에서는 남북연합과 좌우합작운동을 펼쳤던 여운형 선생은 오로지 민족화합을 염원하던 민족지도자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반공이데올로기가 등장했고 이후 반공을 국시로 삼던 시절이 길게 이어졌다. 여운형 선생은 한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래 불행하게도 오랫동안 빨갱이로 낙인찍혀있었다. 뒤늦게 복권되어 2008년 선생에게 건국훈장이 수여되었으며, 10년 전에는 양평 생가에 여운형 기념관도 개관되었다.


아버지는 해방정국의 혼란속에서 1946년에 창설된 국방경비대에 들어갔다. “있을 곳이 마땅찮아서 국방경비대에 들어갔는데 그곳이 그런 데인 줄 몰랐다.” ‘그런 데’가 어떤 데를 말씀하신 건지 나는 잘 모르겠으나, 아버지의 사상과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국방경비대는 미군정 하에서 설립된 오늘날 국군의 전신이다. 치안을 목적으로 창설된 국방경비대는 좌익세력을 색출하고 탄압하는 임무도 수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는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 씨와 같은 부대 소속이었다. 그가 하루는 아버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하길 “심군, 자네 보기 부끄럽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뭘 부끄러워했는지는 말한 본인만 알 것 같다.

Screenshot_20220228-235315_Gallery[1].jpg 아버지의 손때묻은 책


아버지는 휴머니스트였다. 동족끼리 좌우를 구분하여 적대시하는 현실에 동조할 수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중대장에게 편지를 써놓고서 중대장의 위조 도장을 만들어 외박증에 찍고서 탈영했다. 중대장이 아버지가 쓴 편지를 보고 ‘심 군’은 찾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


군을 탈영한 아버지는 주민등록증을 위조하여 수많은 곳을 전전했다. 일제로부터 광복은 되었으나 그 기쁨을 누릴 겨를도 없이 동족끼리 싸우는 비극이 가슴 아프고 허망하여 절간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잠시 몸담았던 속리산 복천암을 떠나 다시 방황의 길을 이어갔다.

한때는 해주 집이라는 요릿집에서 일을 도우며 머물렀다. 그곳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의 슬픈 사연을 듣고서 동질감을 느꼈고, 그녀들의 편지를 대필해주기도 했다. 아버지의 슬픈 한탄을 적은 글을 본 녀들이 울면서 친동생 하자고 하였다. 아들이 없던 해주 집 사장이 정직하고 일 잘하는 아버지를 아들 삼고싶어 했으나, 아버지는 또 그 요릿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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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털터리인 아버지의 배고픈 유랑은 계속되었다. 어느 주장(막걸리 만드는 곳)에 들어가 밥 배부르게 먹으니 새경도 정하지 않고 일해 주었다. 술 제조하는 법도 배워 직접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 집에서 신임을 받아 3년을 살았다.


아버지는 또 상주군 화북면 국유림 삼정농림관리사에 취직(그땐 그런 직업이 있었던 모양이다) 했다. 그곳에 드나드는 유지들이 아버지를 성실하고 똑똑하다며 칭찬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서장에게 말해줄 테니 순사(순경) 시험을 치라고 권유했다. 아버지는 피해 다니는 입장이라 시험을 볼 수도 없었지만 그럴 마음도 전혀 없었다.


6,25가 발발하기 전 아버지는 사무실에 ‘동족상쟁 반성하자’라고 써붙여놓았다. 사장이 놀라면서 “경찰들이 북한을 적으로 아니까 글귀를 떼라. 들키면 큰일 난다”라고 했다. 글귀를 떼면서 아버지는 "너무 슬펐다" 라는 말로 그때의 울분을 표현하셨다. 그 얼마 후에 6.25가 터졌다.


아버지는 더욱 철저한 도피생활을 해야만 했다. 고향을 멀리 떠나, 남쪽 어느 지방의 유지 집에서 일을 도우며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집은 철저한 반공주의자 집안이었다. 주변에서 아버지를 의심했으나 주인이 세도가였으므로 노골적으로 조사하진 않았다. 주인 역시 의심하면서도 아버지가 필요했으므로 덮어주었다. ‘의심 안 받으려고 김일성 욕을 먼저 했던’ 때가 이때였던 것 같다.

Screenshot_20220228-234726_Gallery[1].jpg 떨어진 책장이 투명테이프로 붙여져있다.


아버지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신분을 숨겨야 할 만큼 뚜렷한 좌 편향적 활동을 하셨을까? 나는 알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아마 시대 탓이 컸다고 생각한다. 재수 없으면 멀쩡한 사람도 빨갱이라는 누명을 썼다. ‘좌’라는 글자에 발끝만 담갔다 뺐더라도 온 가족이 빨갱이로 몰려 경을 치기도 하는 무서운 세상이 지속되었다.


아버지가 거주하던 주인집 동생이 그곳 면서기였던 관계로 그 지역에 아버지의 본적과 호적을 위조하여 주민등록을 만들어 주었다. 헌병들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려고 호시탐탐 살폈고 경찰들은 상을 파는 행상 등으로 위장하고 의심가는 사람을 잡아갔으나, 아버지는 새로 만든 위조 증명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그러한 이유에서였는지 아버지는 그 집에서 3년 동안 무보수로 일했다.


본명을 버리고 가명을 사용했던 아버지는 호적이 들통날까봐 자나깨나 조마조마했다. “평생을 간을 조리면서 살았다. 슬프게만 살았다.” 아버지의 이 말씀은 아직도 내 가슴을 친다. 아버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살얼음판을 걷듯 살다 가셨다. 내 나이 20대가 넘을 무렵에야 아버지는 본명을 찾아왔던 듯하다. 나는 단순히 아버지의 이름이 두 개인 줄로만 알았다. 어릴 때부터 익숙히 알아왔던 위조된 이름에 아버지의 한 많은 사연이 응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나의 아버지라는 한 개인의 슬픔은 좌우의 이념적 갈등으로 서로를 적대시했던 우리 민족의 뼈아픈 슬픔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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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지한 아이처럼 상상해본다. 아버지가 우익성향을 지녔더라면, 만일 국방경비대에서 탈영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순사 시험을 봤더라면, 이후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으로, ‘애국’ 경찰로, 필요에 따른 ‘신분세탁’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류에 부합했더라면 아버지의 삶이 그토록 고달프진 않았으리라고. 그랬더라면, 개인의 욕망과 이익에 조금이라도 집중했더라면, 아버지의 자식인 우리 형제들도 시골 깡촌의 촌뜨기로 자라지 않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헛된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성장하여 중년을 넘긴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공감하고 이해하며, 한편으로 뿌듯함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민족과 인류의 안위와 고통에 민감했던 분이었다. 폭력과 반목과 비난, 그리고 이념적 갈등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셨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엔 석가모니와 공자, 예수님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평화주의자였다.

이후 한동안은 유교를 중심가치로 두셨지만 돌아가시기 직전엔 내게 불교의 <선가귀감>을 읽으라는 말씀을 유언으로 남기셨다. 아버지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학구적이고 문학적이었다. 60년대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들던 시절, 시골 벽촌에서 신문을 구독하던 이는 아마 그 마을에서 아버지가 유일했을 터이다. 어쩌면 신문을 통해 남북한 통일이라는 희망적인 문구 하나라도 발견하고 싶은 심정 또한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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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가난한 농부로 살았으나 지적 탐구에 대한 욕구를 버리지 않으셨다. 당신이 소장했던 낡고 닳은 톨스토이의 <哲學讀本(철학 독본)>과 플라톤의 <국가, 소크라테스의 변명>, <선가귀감> 등의 책들은 인생에 대한 질문의 답변과 통찰을 얻고자 했던 고민을 증명한다.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너덜해진 책들은 세월을 증명하듯 투명테이프와 파란태이프로 덧발라져 있었다.

어쩌면 현실인식이 미숙한 이상주의자였을지라도 아버지는 순수했던 사상과 가치관, 그리고 고고한 정신세계를 지녔던 분이다. 자식으로서 부친에 대한 평가를 한다는 것이 어색하나 이러한 판단은 내 형제들 모두 동일하게 공유하는 부분이다.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으나 아버지는 자식들 마음속에 은근한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아마도 아버지의 진정한 노래는 <인류가 종교 갈등 이념갈등을 넘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었으리라.



여기까지 아버지의 단편적인 육성과 나의 기억을 토대로 기록하였다. 일평생 깊은 트라우마를 안고 사셨을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야 당신의 굵은 발자취를 토막토막 말씀하셨다. 당신의 젊은 날의 행적이 행여 자식에게까지 어떤 해가 미칠까 염려하여 80이 다 되시도록 자식들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아픔이었다.

나는 한때 아버지의 일생을 소설로 쓰고 싶었다. 그러나 내 능력 밖의 일로 여겨져 꿈을 접었다. 대신 이제 ‘아버지의 노래’를 매우 짧게나마 총 5편으로 정리하였다. 아버지가 들려준 단편적인 내용에 살을 붙이지 않고 육성 그대로를 적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따라서 최대한 개관적으로 서술하였다. 이 미미한 글은 그야말로 가는 뼈대 몇개를 대략 세워놓은 셈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아버지의 옷섶에 달린 실오라기 하나를 만지작거린 것에 불과한지 모른다. 아버지의 기록이라고 내놓기조차 민망하고 무안하다. 이 글을 쓰면서야 아버지 살아계시는 동안엔 깨닫지 못했던 당신의 한과, 비통과 슬픔과 한탄이 절절히 다가왔다. 아버지의 외로움과 고독을 너무 늦게 알게 된 죄송스러움으로 가슴이 아린다.

Screenshot_20220228-234253_Gallery[1].jpg 아버지의 친필

펜을 놓으면서, 그러나 아주 조금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이 글을 볼 때마다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오래전에 저세상으로 떠나신 아버지가 지금은 어떤 존재로 어느 세상 어느 우주에 계시든 모든 것에서 떠나 완전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시기를 마음 다하여 빈다.

마지막으로 <톨스토이 原著(원저) 哲學讀本(철학 독본)> 책 뒷장에 아버지가 한자로 써놓으신 내용을 적는다. 아버지의 심중이 이것이었을까.......


“ 밭 가는 것이 본래 영웅의 일이다. 지자는 때를 알아 재야에서 농사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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