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노래 4
나 어릴 때는 명절이면 연로하신 집안 어르신을 찾아뵙는 건 젊은 사람들의 필수 도리였다. 명절이 되면 잊지 않고 아버지께 인사 오는 동네 오빠가 있었다. 아버지 연세가 아직 노년이 되기 전부터였다. 그는 우리 집안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남이었다. 마을을 떠나 도회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명절 때 술 한 병을 들고 우리 집을 찾아오곤 했다.
그의 부모는 ‘당골’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집을 지칭할 때 당골네, 그의 어머니를 당골 에미라고 불렀다. 요즘 말로 하면 무당이다. 하지만 그 어머니가 당골 활동을 활발히 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굿을 한다든가 특별한 행위를 하는 것을 못 봤기 때문이다. 그 집과 우리 집은 바로 이웃하고 있었다. 그 집 자녀들과 우리 형제들 나이가 엇비슷했으므로 어른도 아이들도 서로 친하게 지냈다.
나는 당시에 너무 어려서 아무런 인식이나 개념이 없었지만 ‘당골네’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하대를 받았던 모양이다. 나의 어머니도 그들에게 하대를 했다가 아버지로부터 혼쭐이 났다고 한다. 어머니가 “남들 모두 그렇게 하는데...”라고 변병하자 “남들이 해도 우린 하대하면 안 된다.”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고 어머니는 회상했다. 당시엔 당골을 천한 직업으로 취급하여 젊은 사람도 그들을 대할 때 ‘하게’ 하였고, 더 나이 든 사람은 ‘해라’라고 낮추어 대했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그 집은 ‘당골네’였지만, 가정사 같은 일상에서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주 아버지를 찾아 도움을 요청했던 것 같다. ‘당골네’ 뿐 아니아 동네의 다른 사람들 몇몇도 복잡한 일이 터지면 아버지에게 와서 상의하곤 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마을에서 그만큼 신임을 얻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관련된 또 다른 얘기를 해보겠다.
대체로 아이들이 그렇듯 우리 형제들도 어릴 때 강아지를 매우 좋아했다. 물론 부모님도 개를 예뻐하셨다. 애완견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그 당시, 시골에선 마당에서 개를 키우는 집이 많았다. 우리 형제들도 남들처럼 개를 갖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한 번도 개를 키우지 않았다. 아버지의 반대 때문이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개 한 마리를 길렀는데 기르던 개를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되었다. 정들었던 개와 작별하던 날을 아버지는 이렇게 회상했다. “헤어지기 싫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모습이 얼마나 애처롭던지, 그 뒤로는 절대 개를 기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개와 헤어진 지 몇십 년이 지난 뒤였지만 말하는 아버지의 얼굴에선 여전히 애처로움이 묻어났다.
아버지의 뒤이은 말씀은 이랬다. “강아지를 기르는 것까진 얼마든지 괜찮다, 그런데 강아지가 다 자라면 어쩔 것이냐? 그것을 잡아먹겠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팔 수가 있겠느냐?” 애완견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요즘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나, 그때엔 집에서 기르는 동물을 잡아먹는 것이 시골에선 흔한 일이었다. 소, 돼지와 마찬가지로 개도 식용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보통은 당연하게 키우던 개를 누구를 주고 데려오고 심지어 잡아먹기까지 했지만, 개라는 동물도 감정이 있는 생명을 가진 존재인 이상 아버지는 차마 못할 일로 여기셨던 것 같다. 아버지의 그런 감성은 그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또 다른 목소리가 떠오른다.
“시골에서, 곳간에서 찍찍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없더니 깡통에 못이 뾰족뾰족 나왔는데 거기에 생쥐가, 그 못에 걸려있어서 그것을 잡아 똥통에 넣고 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 쥐가 누구에게 해코지한 것이 아닌데 죽게 한 것이 정말 마음에 걸렸다.”
못에 찔려 괴로워하는 생쥐를 엉겁결에 '똥통'에 버린 다음 아버지는 아차! 하고서 크게 후회하셨던 모양이다. 그 생쥐를 살려주지 못한 후회가 얼마나 컸던지 아버지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그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셨다. 아버지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평등사상과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깊은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