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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미소 Aug 26. 2021

가족이라서 고마워

천사의 딸 

천사의 딸    

                                                              전 영 임         

 다리를 잘록거리며 학생용 백 팩을 등에 메고 한적한 도로가를 40대 후반쯤 되는 자그만 여자가 걸어가고 있다. 중학교 1학년쯤이나 되었을까? 패딩점퍼에 목도리를 한 여자 아이가 한 걸음 앞서 걷는다. 아이는 맨 몸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걸었고, 여자는 자신의 상체보다 더 커 보이는 가방을 힘겹게 등에 메고 아이를 뒤 따라가고 있다. 중앙선 건너 맞은편에서 차가 오고 있었으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아이의 걸음에는 투정이 묻었고, 여자는 아이의 걸음을 따르려는 조급함이 얹혀 다급하다 못해 몸이 심하게 뒤뚱거렸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휘청거리는 걸음에 보고 있는 내 마음이 오히려 더 아슬아슬하다.     

그때였다. 까맣게 잊고 있던 오래전의 일이 불각시 소환되어 왔다. 집이 시골이었던 나는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버스로 통학을 하며 다녔다. 새벽 6시 50분 첫 버스를 타려면 늦어도 여섯 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지붕도 없는 컴컴한 샘가에서 바깥 세수를 하고 새벽밥을 먹었다. 늦가을부터는 앞도 잘 안 보이는 안개 자욱한 길을 20여분은 걸어야 버스가 다니는 도로까지 갈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도 1시간을 더 가야 시내였다. 또 거기서 20여분을 걸어 학교에 도착하면 진이 다 빠지곤 했다. 어쩌다 버스가 늦으면 8시 30분부터 시작하는 자습시간에 늦어 운동장을 몇 바퀴 돌아야 하는 벌을 서기도 했다. 그 버스를 놓치면 걸어야 했고 2교시가 끝나도 학교에 도착 못 할 때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병치레가 잦아 다른 아이들보다 작고 약했던 나는 늘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날마다 일여덟 권의 교과서와 공책, 문제지를 넣은 가방은 배가 불룩해 약한 내가 들기에는 턱없이 무거웠다. 지금처럼 등에 멜 수 있는 가방도 없는 때였다. 처음 중학교에 입학하고 가방이 너무 무거워 팔힘이 없어 머리에 이고 다니곤 했다.     

 입학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날부터 엄마는 새벽길을 함께 걸어주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아마도 내가 늦잠을 자서 뛰어가더라도 버스시간이 간당간당했을 때였던 것 같다. 엄마는 나보다 먼저 가방을 챙겨 들고 문밖을 나섰다.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 겨우 버스를 탔는데 그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내리니 엄마가 기다리고 계셨다. 내 가방을 받아 든 엄마와 집으로 돌아오면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재잘거리며 엄마에게 이야기 했다. 그때부터 3년 내내 엄마는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나와 함께 새벽길을 나서고 저녁 길에 돌아왔다.     

 봄부터 가을까지 들일을 하고 바로 정류장으로 온 엄마의 모습에서 오늘 하루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방이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다 왜, 이걸 들고 어떻게 이 먼 길을 걸어 다니겠노?” 진작 알지 못해 미안해 하셨다.

 엄마는 어쩌다 들일이 늦어 일찍 마중을 못 나오시는 날에는 집으로 가는 길 어디쯤에서 만나게 되는데 헐레벌떡 뛰어나와 ‘늦어서 미안하다’며 내 가방을 빼앗듯 들어주곤 하셨다. 가끔 그런 엄마가 안 돼 보여 일부러 학교에 책을 몇 권두고 한 손으로 가방을 달랑 들어 가볍다는 시늉을 보이곤 했다. 하지만 책상 하나가 전부였던 그 시절, 책상 안에 책을 보관하기는 한계가 있었다. 매일 달라지는 과목 때문에 책을 두고 다니는 건 쉽지가 않았지만 힘든 엄마를 생각해 옆 친구의 서랍도 빌려가며 책을 두고 다니려 애썼다. ‘약하게 놓은 내 죄’라며 그것마저도 당신의 잘못으로 돌리던 엄마와의 인연은 내 인생 최고의 만남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 더 절실하게 알았다.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나를 앞세워 집을 나서고 돌아오던 엄마의 노고가 얼마나 컸었는지를. 농사일로 파김치가 된 몸으로 헐러 벌떡 뛰어오는 엄마의 모습은 늘 무엇엔가 쫓겨 사는 삶 같았다. 안 와도 된다고, 내가 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괜찮다’고 늘 말씀하시던 엄마,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의 마음을 알았고 그만큼 고마움이 컸다. 먼저 살아 간 분들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걸 익히 알지만 ‘아이를 낳고 키워 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했던 그 말을 절감하며 살았다.    

 엄마는, 신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아주 특별한 천사임에는 틀림없다. 이 세상 그 누가 나를 자신보다 더 아끼고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리 내 아이들에게 잘한다고 해도 엄마의 그 사랑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매번 느낀다. 아흔일곱의 나이로 요양원에 계시면서도 아직도 나를 바라보시는 엄마의 눈빛은 철없는 막내를 보는 애 마른 마음이다.

‘누워라, 쉬어라, 바쁜데 왜 자꾸 오노!’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습관처럼 하시는 말씀인 걸 알기에 엄마의 그 말씀을 들을 때면 더 가슴이 짠하다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요양원에서 삶의 행간을 넘나들며 어제, 오늘도 잘 분간 못하시며  살아가는 엄마의 시름보다, 오늘 내 아이의 안타까운 모습에 더 마음이 이끌릴 때면 늘 죄송한 마음이다. 나도 내 아이들의 어미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핑계를 대지만 어쩌면 그것은 엄마라는 마음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살면서 나는 결코 엄마의 사랑을 갚을 수 없을 것이다. 흉내도 못 낼 것이다. 오로지 희생이 당신의 삶이라 숙명으로 여기며 살았던 엄마의 그 사랑, 나는 천사의 딸이었다.     

 앞서 걷던 아이가 걸음을 멈춘다. 바람이 부는지 나뭇가지가 심하게 흔들거린다. 뒤따라가는 여자는 아이가 발걸음을 멈춘 사이 나무를 잡은 채 허리를 구부려 오른쪽 무릎을 만진다. 여자와 아이를 지나쳐 오던 나는 차의 속도를 줄이며 백미러를 통해 그들을 보았다. 아이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벗어 여자의 목에 둘러주고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여자의 무릎을 주물러 주고 있다, 그 사이 그녀는 다시 그 목도리를 벗어 아이에게 둘러주고는 아이의 두 볼을 감싸는 모습이 점점 멀어져간다. 코끝이 시큰해지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차의 핸들을 돌렸다. 그리고는 마음이 바빠졌다. “임이 오나?” 불러주는 엄마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나는 지금 나의 천사를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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