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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미소 Aug 26. 2021

가족

동행

동행  

                                                          

 요양병원 휴게실에서 마주 앉은 노부부를 본다. 넓은 휴게실 구석 자리 긴 탁자 끄트머리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앉아있다. 아까부터 할아버지의 조곤조곤한 말이 속삭임으로 들려왔다.
“그래, 그래, 그거 내야지. 그래그래, 그렇지 그거, 잘했네!”
할아버지는 연신 할머니를 쳐다보며 ‘잘했다’ 칭찬하고 있었다. 기분 좋아 웃던 할머니는 간간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떼를 썼고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타이르듯 달랬다. 잠든 엄마를 잠시 혼자 나온 터라 귓불을 바짝 당겨 앉았다.

 할머니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아마도 병문안을 온 것 같다. 탁자 위에는 화투장이 어지럽게 깔려있었고 눈을 반짝이며 화투장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할머니와는 달리 할아버지의 힘없는 눈길은 온통 할머니에게로 쏠려있다. 허름한 회색 점퍼 차림에 길지도 짧지도 않은 어중된 흰 턱수염, 백발의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애잔함이 가득하다. 바닥에 깔린 화투장이 할머니 앞에는 길게 늘어져 있지만, 할아버지 앞은 텅텅 비어있다. 할머니는 연신 짝을 맞춘 화투장을 당신 앞으로 끌어모으셨고, 할아버지는 또 연신 그런 할머니를 잘한다고 추켜세우고 있다.
할아버지의 칭찬 한마디마다 환하게 웃으며 신이 나는 할머니, 아마도 칭찬이 몹시 고팠던 새댁 시절이 있었나 보다.
“그렇게 좋은가? 내 평생 칭찬 한마디 못 해주고 고생만 시키고 살았는데 진작 자네 칭찬 많이 해 줄 걸 그랬네!”
 물끄러미 할머니를 바라보며 할아버지가 푸념처럼 뱉은 말속으로 그의 과거가 소환되어 오는 듯했다.
그 시대 다수의 남편들이 그랬듯 어지간히 아내 속을 썩였나 보다. 표현이 서툴렀던 시대, 남성 우월주의 시대에 살면서 남우세스러워서도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으리라.

 문득 언젠가 설문조사를 위해 찾아갔던 어느 노부부의 집이 생각났다. 예고 없이 찾아간 방문객을 반갑게 맞아 주는 건 아직도 순수함이 남아있는 농촌의 정서다. 외로움이 짙게 밴 그분들에게 누군가의 방문은, 그래서 잠시의 말벗이라도 되어주는 시간은 따뜻하게 데운 차 한 잔과도 같은 시간인가 보다.
 불각시 문을 열고 들어선 나를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셨다. 집안으로 들어선 나와 할머니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낯선 사람의 방문이 궁금했는지 기척 없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방문을 열었다. “누가 왔는가?”
방문을 열면서 할아버지가 뱉은 단 한마디였다. 하지만 이 한 마디에 할아버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듯 파편처럼 튀던 할머니의 속사포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놈의 영감쟁이, 젊어서 그렇게 고생시키길래 늙어서도 쌩쌩할 줄 알았더니만, 저래 아파 누워 삐대며 죽지도 않고, 늙어서까지 죽도록 날 고생 시키는 애물단지 같은 영감쟁이, 뭐가 궁금해서...... 시끄러워요, 문 닫아요!”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렇게 쏘아붙이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할머니는 속을 삭이느라 씩씩거리고 있었다. 난감해 어쩔 줄 모르는 나와는 달리 할아버지는 ‘어허,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하며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는 듯 헛기침을 하며 슬며시 문을 닫는 것이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아버님 민망하시겠다. 그러지 마세요.”
 듣는 할아버지보다 후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더 후회하실 할머니가 걱정되어 웃으며 말하는 내게 할머니는 겸연쩍은 듯 빙긋 웃으며 말씀하셨다.
“내가 이래 말해도 진심이겠는가? 젊어서 하도 내 속을 썩이고, 구박하길래 평생 그렇게 쨍쨍하고 건강하게 살 줄 알았지. 실컷 고생만 하고 이제 살만하니 병들어서 저래 자리 깔고 누워있으니 내 속이 터질 지경이네.”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들어주느라 오후 시간을 다 보내고 어둠이 주렴으로 내려서야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 일이 문득 생각났다.

 ‘그래, 어쩌면 다행이다. 상처받은 할머니는 기억이 없고, 상처 준 할아버지는 저렇게 과거를 후회하니 그 노부부에 비하면 참, 다행이야!’ 혼자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그래, 그래 나는 괜찮다. 밥은 챙겨 먹었나? 그래그래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다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니는 아픈데 없나? 직장은 잘 다니고? 차 조심하고, 사람 조심하고, 그래그래, 우리는 다 괜찮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래’만 외우던 할아버지, 아마도 자식에게서 온 전화인가 보다. 그 사이에도 할머니는 신이 나서 연신 화투짝을 맞춰 당신 앞으로 줄줄이 늘여놓는다. 간간이 통화하던 할아버지의 손이 짝이 맞지 않는 화투장을 챙기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짝 맞는 화투장으로 가져간다. 그러자 할머니는 어린아이 마냥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할머니와 근심 가득한 할아버지의 얼굴이 대비되어 내 동공을 타고 가슴으로 스며든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 기억이 사라져야 한다면 상처받은 이의 기억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상처 준 이의 기억은 선명한 필름처럼 남아서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후회도 하고, 미안해하며, 그 마음으로 다 갚고 조금은 덜 미안한 마음으로 이승을 떠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건널 수 없는 강, 그 강 건너에서 재회한다면 다 잊고, 새롭게 반가운 마음으로 만날 수 있도록 그리움만 남겨두면 좋겠다.
 어느새 저녁노을이 불그스름하게 물들고 있다. 노을 비치는 창가, 마주 앉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실루엣이 정겹게 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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