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네임을 부탁해
오색찬란한 명절 : 1편 한지운의 이야기
- 풀네임을 부탁해
1.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가 옥탑방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번 명절 연휴 중 하루 시간을 내라고 했다.
맞선 보라는 거면 싫다고 했더니, 폭풍 잔소리가 이어졌다. 우리 모녀의 대화는 끊임없이 평행선을 달렸다.
그동안 내가 뿌린 축의금이 얼마인지 아냐?
라는, 엄마의 말에 이 말이 왈칵 입 밖으로 튀어나갈 뻔했다.
그럼 엄마가 한번 결혼을 더 하면 되겠네.
나는 심호흡을 하고,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이래서, 내가 이번 명절 연휴에 임아연처럼 해외 여행을 가려고 했던 것이다. 아연이 맡기고 간 갈색
푸들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 벌써 밥 때가 되었구나.
엄마랑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하마터면 나의 돈줄을 그냥 방치할 뻔했다.
아연은 해외 여행을 가면서 자신의 푸들을 돌봐주면 수고비를 주겠다고 말했다.
월세가 밀려 있는 나로서는, 굳이 마다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2.
엄마, 나 지금 손님 오셨어, 라는 말로 황급히 통화를 끝내고 아연의 강아지 사료를 챙겨주었다.
정말, 손님이 오긴 왔다. 나의 남자친구 김재훈.
재훈이 골목 어귀에 있는 마트에서 나오는 모습이 옥탑방 창문에서 내려다 보였다.
그는 아직 이 집을 모른다. 딱 저기, 나의 단골 마트까지만 알려주었다. 마트에서 이 집까지는 약 5분
거리니, 그가 알려고 마음만 먹는다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알려주긴 싫었다.
며칠 전 있었던 그 일 때문은 아니다. 4개월이나 만났는데, 아직도 나의 성을 제대로 모르는 남자.
그리고 이번 명절에 자기의 부모님과 식사를 하자는 남자.
아직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건 부담스럽다고 딱 잘라
거절했지만, 그는 결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니 크게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남자친구의 가족을 만나는 일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연애할 때는 그와 나, 두 사람만 신경 쓰고 싶다.
남자친구의 존재는 부모님에게도, 절친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오직, 이 집에 사는 사람들만 그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다.
멀리 데이트하러 나가는 것이 귀찮아 동네 카페, 동네 영화관, 동네 식당을 두루 돌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려진 것이다. 동네 구석구석을 함께 돌아다니면서 정작 이 집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은 모순된 일이지만,
난 아직 이 공간의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다.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다던가.
여성들이여 자기만의 방을 가져라.
어쨌든 이번 명절에는 계속 이 옥탑방에 있을 생각이다. 지난주에 이야기술사라는 필명으로
첫 연재를 시작한 문화 매거진 '뷰파인더' 원고부터 시작해 당장 마감을 코앞에 둔 기업
사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 때문이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서 명절 연휴 내내 있어 봐야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그 시대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수많은 여자들이 명절 때문에
시공간적 제약을 받고 있다.
명절 선물로 과일 상자를 갖다 주러 갔을 때 잠깐 보았던 주인집 소유주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소유주는 결혼 1년을 갓 넘긴 신혼이다. 밀린 월세 대신 과일 상자를 줘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과일 상자 대신 최고급 한우 세트였으면, 소유주의 굳은 표정이 좀 풀렸으려나?
하지만 최고급 한우 세트는 거의 옥탑방 월세와 맞먹는 돈이다. 아니, 월세보다 더 비싸겠지.
회사원이었을 때는 명절이 되면 떡값이다, 인센티브다,
이것저것 챙겨 받는 게 많았고, 매우 드물긴 하지만 한우 상자를 명절 선물로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말이
프리랜서지 백수나 다름없는 지금, 내게 명절 선물이나 보너스를 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서글퍼졌다.
“지윤. 지금 마트 도착했어. 보고 싶어요♥”
오빠가 보고 싶어 하는 지윤은 여기 없어요, 라고 답장을 쓰려다가 지웠다.
길게 답장 쓰는 것이 귀찮다. 차라리 말로 해야겠다.
네, 나가요.
짧게 답장을 보내고, 그와 나의 약속 장소인 마트로 나갔다.
재훈이 나를 보자마자 묵직한 상자를 건넨다.
“이거 부모님께 명절 선물로 갖다 드려. 고깃집 하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가져왔어. 최고급 한우 갈비세트야!”
“누구 부모님께? 안지운의 부모님이요? 아니면 한지윤의 부모님이요?”
"그건 오타였어. 진짜야 맹세해."
재훈은 이번엔 정말이라고, 믿어달라고 했다.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비슷한 일이 생기니 그의
진심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 사귀기로 했을 때 서로 부담은 주지 말자고 한 거 기억나요?"
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아니 김재훈씨는 그 이야기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말자는 이야기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지 말자는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김재훈씨는 4개월이나 만나는 동안 여자 친구의 성과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네요? 그런데 성이랑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여자친구의 부모님께 드릴 명절 선물은 가져오는군요. 대체 김재훈씨가 연애하는 대상은 누구죠?"
"왜 그래? 무섭게. 나 사람 이름 잘 기억 못한다만 말이야. 그렇다고 내 진심까지 거짓이라고 생각하진
말아줘."
재훈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재훈씨는 내가 좋은 게 아니라 어쩌면 단지, 연애 놀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게 좋은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재훈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졌다. 그래, 내 잘못도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3.
나와 재훈은 사보 기획사에서 처음 만났다.
재훈은 중형 사보 기획사에서 신 사업 계획의 일환으로 팀을 꾸린,
옥외광고파트의 영업사원이었고,
나는 그 회사에서 출산 휴가 간 정직원 대신 상근하던 프리랜서였다.
늘 마감에 치이느라 바쁜 정직원들은 상근 프리랜서와 함께 점심을 먹어줄 여유가 없었다.
혼자서라도 밥을
먹을 용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강추위를 뚫고 굳이 회사 밖을 나가서 점심을 사 먹기는 싫었다. 그래서 그
회사에 출근하는 동안 내가 배정받은 자리에서 커피와 샌드위치, 삼각김밥, 컵라면 등으로 대충 점심을
때우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영업을 마치고 돌아온 재훈이 초밥이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보면, 늘 점심을 혼자 드시는 거 같아서. 여기 출근하신 지는 얼마나 됐죠? 이 회사는 사람이 새로
들어왔으면, 아무리 다른 팀이라지만, 인사는 시켜줘야지."
재훈은 내가 새로 들어온 직원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 직원은 아니고, 잠깐 일을 도와주러 온 프리랜서예요. 급한 대로 일단 한 달만 상근 하기로 했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그래도 초밥은 드세요. 정직원이면 어떻고, 프리랜서면 어떻습니까? 다 같이 저희 회사 일
하는 분들인데요."
별 거 아닌, 말 한마디였지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그날 이후 그는 캔 커피나, 캐러멜 같은 것들을 종종 챙겨주었다.
"원래 글 쓸 때 집중하면, 당이 떨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아, 예전에 어떤 사람이 그랬어요."
어떤 사람이요? 라고 물을 뻔 한 걸 참았다. 전 여차친구? 아니면 가까웠던 직장 동료?
전 여자친구라면, 이 사람은 그동안 어떤 연애를 해왔을까?
어떤 사람, 이란 한 마디에 수많은 궁금증이 생겼다. 재훈 역시 나의 속마음을 읽은 듯
했다.
"어떤 사람이 그랬는지 궁금해요?"
"아, 말씀하기 싫으시면 굳이 안 해도 돼요."
"우리가 좀 더 친해지면, 얘기해줄게요. 그런 의미에서 밤에 맥주 한 잔 어때요?"
재훈의 눈빛에서 그 역시 내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신나게 영화 이야길 했다.
재훈 역시 한때는 영화광이었다고 했다. 그의 취향은 넓고 다양했다. 타르코프스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부터 일본 전대물 영화까지 두루 섭렵했다. 애니메이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훈은 출퇴근 시간에 애니메이션을 다운 받아 볼 정도였다. 재훈의 하드
디스크에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별로 폴더가 따로 만들어져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소름이 끼쳤다.
나의 DVD 진열장도 픽사, 디즈니, 드림웍스, 지브리, 스튜디오 치즈 등 애니메이션 제작사별로 칸이
마련되어 있다. 나는 소울메이트를 만난 기분이었다.
4.
“오빠, 아스카 풀네임이 뭐죠? 갑자기 생각 안 나는데. 성이 카츠라기였나”
“아니, 그건 카츠라기 미사토. 아스카는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역시, 잘 아네요? 애니메이션 캐릭터 풀 네임은?”
이렇게 뻔한 유도신문에 걸려들다니. 우린 지금 이름 때문에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풀네임을 물었을 때의 정답은, 딱 하나였다. 아까처럼 나 원래 사람 이름 못
외운다니까, 라고 말했다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왜냐면 명절이니까. 명절에 엄마하고 싸웠는데,
남자친구하고 또 싸우긴 싫으니까. 그런데 틀린 정보를 정정까지 해주신다?
“나는 2D 캐릭터보다 못한 존재네요. 오빠는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하고, 카츠라기 미사토의 족보까지
외우면서 살아요. 이 한우세트는 안 받은 걸로 할게요.”
재훈에게서 받은 한우세트를 길바닥에 던지듯이 하고 돌아서는데
“미안, 내가 잘못했어. 니가 시키면, 너희 집 족보라도 외울게.”
라는 말에 그만 빵 터질 뻔했다. 지금까지 성도 제대로 몰랐던 주제에, 우리 집 족보를 외우겠다고?
그 뻔뻔한 말에 이 남자를 조금 골려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오늘 저녁 일곱 시까지 내가 무슨한씨 무슨 공파 몇 대손인지 알아가지고 와요. 족보 줄테니까.”
사실, 나도 족보는 거의 볼 줄 모른다. 하지만 남자친구의 만용이 기 막히기도 하고, 한편으론 조금
귀엽기도 해서, 생각나는 대로 뱉어버렸다.
“아, 알았어. 그런데 너희 집 족보는 어디에 있는데?”
“당연히 우리 집 안방에 있죠.”
“안방? 너 자취하는 거 아니었어?”
족보는, 부모님 집에 있다. 남자친구에게 골치 아픈 숙제를 내주려면 집에서 족보를 가져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엄마 얼굴을 또 봐야 하고. 엄마에게 얼굴을 보이면 당장 맞선 장소에 끌려나갈지도.
“그냥 감으로 맞춰요. 생각해보니까 족보 지금 없어요.”
“그걸 어떻게 감으로 맞춰?”
“족보 갖다 주면, 족보는 볼 줄 알아요?”
“사실, 잘 몰라. 그래도 그냥 맞추는 거보단 나을 거 아냐.”
“흐음, 그럼 한 번만 더 내 이름 틀리면 그땐 어쩔 건데?”
“그땐 내가 성을 갈게. 김재훈이 아니라 안재훈으로. 개명 신청할 거야.”
“웃기고 있네. 말이나 못 하면.”
“너 기분 좀 풀렸어?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는데?”
끝까지 화를 내고 싶었는데, 피식피식 계속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5.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가요. 다음번에 만약, 문자에 내 이름 틀리게 보내면, 그 이후로 영원히 답은 없을
거야.”
“각서라도 쓸까?”
남자친구가 종이와 펜을 찾는 시늉을 했다.
“아, 좀, 촐삭대지마”
핀잔을 주긴 했지만, 허둥지둥 대는 모습이 귀엽긴 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요. 네모 밥 줬더니, 나도 배고파.”
“네모가 누구야?”
“있어요, 객식구. 갑자기 떠맡은 아이. 개팔자가 상팔자인 애.”
“주인이 누군데?”
“말해주면 알아요?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일단 밥 먹으러 가자고. 갑자기 술도 확 땡기네”
나는 골목 어귀의 호프집 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운아, 한지운. 이건 챙겨가야지.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재훈이 내가 바닥에 내동댕이친 한우세트를 챙기며 뒤쫓아왔다.
"우리, 처음 술 마셨던 날, 그때 먹었던 것처럼 먹을까?"
재훈의 팔짱을 끼며 말하자, 그가 대답했다.
"이번엔 네가 쏘는 거야?"
그래, 기분이다. 오늘 같은 날은 어쩐지 취하고 싶어져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응, 그날처럼 안주빨 실컷 세워보자고! 오늘은 명절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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