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백일 반지
커플링 : 한지운의 이야기
- 우리들의 백일 반지
“지운아, 우리 100일 말인데, 그냥 그렇게 넘어가?”
"이벤트 같은 안 해도 된다니까요.”
"그래, 이벤트 말고. 그래도 아무런 선물 없이 넘어가는 좀"
"그날 같이 공연 봤잖아요? 뮤지컬 빕석에서 공연 보는 정도면 됐어요."
재훈은 오늘 따라 전화를 빨리 끊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번에 연재를 새로 시작한 매거진은 매주 금요일 자정에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
문제는 지금 시계가 11시43분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내 목소리에는 점점 까칠함이 묻어 나고 있다. 내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는 뾰족한 가시가 느껴진다.
일부러 까칠함을 몸에 두르고 사는 건 아니다.
나도 바쁘지 않을 때나 고민이 없을 때는 누구에게나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컬러풀 빌리지에 사는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는 대부분, 나의 짜증이 머리 끝까지 차 있는 상태였다.
바로 지금처럼.
나는 손가락으로 초조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나 지금, 바쁘니까 끊는다, 라는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왜냐면, 이런 말을 자주 했다는 이유로, 차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애인하고 통화할 시간도 없이 바쁘면, 연애도 하지 말라고.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와의 전화 통화를 꺼렸던 것이 아니다. 만나서 해도 될 이야기를 굳이 전화로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이다.
예를 들면, 직장 상사와 술값을 걸고 당구 내기를 했는데 무참하게 저버렸다는 이야기를 자정부터 새벽 세시까지 들어주는 것은 연애 초반에 한번이면 족했다. 그와의 통화가 길어지려고 하면, 나는 바쁘다는 말을 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매우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그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돌리려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 오랫동안 통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딱 삼십분이 한계였다. 삼십분이 넘어가면, 내 말투에 성의가 없어진다고 했다. 그는 성의 없는 사람과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그 이전에 만났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들이 나에게 이별을 고하는 방식은 대부분 비슷했다.
너는 성의가 없어, 혹은 너는 네 자신하고 연애 하는 사람 같다, 너에게 나는 몇 순위냐? 제발 휴대폰 좀 확인해라, 내가 먼저 연락을 안 하면, 너는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이번 만큼은 내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노력중이었다. 그 놈의 마감만 아니면, 어쩌면 그 결심을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빠, 바쁜 나를 붙잡고 지금 굳이 그 이야길 해야 돼요? 그런 이야기는 만나서 하라고.
전화 통화는 긴급한 상황에서 용건만 간단히. 그럼, 이만 끊어요.”
“잠깐, 우리 지금 중요한 이야기 하고 있잖아.”
“둘 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100일, 200일 챙기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난 중요해.”
재훈과 만난 이후, 처음 들어보는, 매우 단호하고 강경한 말투였다.
“그런 사람이 100일 지나도록 여자 친구 성도 제대로 몰랐어요?”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 그리고 그건 지난, 명절 때 다 이야기가 끝났잖아.”
“ 누가 이야기 다 끝났대? 그냥 내가 참고 넘어간 거지.”
“나라고, 너한테 서운한 거 뭐 없는 줄 알아? 이거 하자고 하면 싫다, 저거 하자고 해도 싫다.
이거 물어보면, 나중에 이야기 해준다. 저거 물어보면 굳이 알 필요 없다. 그러니 나는 항상 네 눈치를 보게 되잖아.”
“오빠가 하자는 건 다 쓸 데 없는 거니까 그렇지. 나 우리집 가족사진도 안 찍는다는 걸 엄마가 아빠 환갑에 사진관에 끌고 가서 딱 한번 찍었어요. 근데 내가 무슨 돌쟁이도 아니고 100일 기념 사진을 사진관에서 찍어?”
“그래서 놀이동산이나 갈까, 했더니 그것도 싫다며?”
“나 롤러코스터 타면, 진짜 기절 한다니까. 대관람차도 폐쇄 공포증 있어서 타기만 하면 울고 불고 난리나.”
“커플룩은 유치하다며?”
“둘이서 나란히 빨간색 티셔츠 입고 돌아다니자고?”
“그럼, 커플링은? 그것도 싫다고 할 거야?”
“키보드 두드릴 때 반지 알 돌아가는 거 하나하나 신경 쓰면서 글 쓰라고요?”
“누가 알 있는 반지 맞추자고 했냐? 심플한 거 하자는 거지.”
재훈이 흥분한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나 여자친구 생기면, 그땐 꼭 커플링 하고 싶었어. 커플링 선물해주는 게 내 꿈이었는데.”
“10년 사귄 여자친구랑 다 못한 거, 내가 대신해주는 대용품이에요?”
“무슨 말을 넌 그렇게 해?”
질투였을까? 재훈과 CC로 만나 10년 동안 사귀었다는 그녀는, 손가락에 커플링을 낄 수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대체 무슨 직업인데 손가락에 반지를 낄 수가 없지? 의사나 간호사는 아닐 것이다. 재훈과 CC였다면 경영대 출신일 테니까. 졸업 이후에는 직업 때문에 반지를 못 꼈다고 해도, CC였던 시절에는 얼마든지 커플링을 낄 수 있었을 텐데, 대체 그녀는 무엇 때문에 반지라면 기겁을 했을까?
사실, 반지는 얼마든지 낄 수 있다. 글 쓸 때는 반지를 빼놓고 쓰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순순히 커플링을 맞추기는 싫었다.
“아 됐고. 나중에 이야기해요.”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마감을 지킬 수 없었다. 아침이 되었을 때, 편집장에게서 거나하게 욕을 먹었다. 데일리 매거진이라 자정 업뎃은 필수인데, 기본적인 룰 하나 지키지 못하냐고 화를 냈다. 뭐라 핑계 댈 말도 없었다. 편집장 말대로 자정 업뎃을 위해서는 글을 미리 써두었어야 한다. 프리랜서는 시간 관리가 생명인데 괜히 돈 욕심에 이것저것 일거리만 받아와서는, 결국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지 못했다. 자취하기 전에는 그 존재를 알지도 못했던 각종 공과금 고지서를 보자 한숨이 나왔다. 답답한 마음에 바람이나 쐬려고 옥상 계단을 내려가다 2층에 사는 입시 학원 강사와 눈이 마주쳤다. 막 2층의 현관문을 닫으려던 강사가 나에게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나도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평소 컬러풀 빌리지 사람들과 좀 친해져서 가벼운 고민 상담 정도는 하고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반갑게 인사를 건넬 기분이 아니었다.
노트북을 챙겨 동네의 단골 카페로 향했다. 꽃집과 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재스민 향기가 가득했다. 아니, 프리지아 향인가.
마감을 못 지켰다고, 데일리 매거진에서 잘리면 이번 달 공과금은 어떻게 하지?
노트북 커서는 계속 깜박이는데, 머릿속에는 여전히 딴생각만 가득하다.
이래 가지고는, 다른 원고 마감도 못 지킬지도 모르지.
정신을 가다듬고, 키보드에 올려놓은 두 손가락을 움직여보는데,
노트북 화면 아래쪽에 뜬 모바일 메신저 창이 깜빡인다.
“나는 누구 사귀면, 그 사람 생각밖에 안 해.”
재훈이다.
“어제 통화할 때 내가 바쁘다고 했죠? 그때 마감 막 앞두고 있었어요.”
“아, 진짜? 그럼 마감은? 미리 이야길 해주지.”
“계속 바쁘다고 이야기를 했으면, 그 정도는 좀 알아들으면 안 돼요?”
“그래, 앞으로는 마감 앞두고 있으면 이야기해. 그땐 전화 피할게.”
“지금, 지금도 바빠요. 그리고 메신저 그만 보내요. 사진이나 동영상 링크 있을 때만 메신저로 보내라고 했잖아요. ”
문자는 한 통에 보내는 글자 수가 제한되어 있지만, 메신저는 제한이 없기 때문에
일이 바쁠 때는 메신저가 계속 울리면 매우 예민해진다.
“근데, 넌 어째 항상 바쁜 거 같다?”
“난 오빠처럼 월급 꼬박 나오는 회사원이 아니거든.
일거리가 있을 때는 새벽이고, 주말이고 가리지 않고 일해야 하는 프리랜서니까요.”
메신저 로그 아웃을 하고 나니, 내가 좀 심하게 짜증을 내고 있나 싶었다.
시간 관리를 못해 마감을 못 지킨 건 어쨌든 내 잘못인데,
그걸 왜 남자친구한테 화를 내는 거지? 남자친구가 나의 짜증을 받아줘야 하는 사람은 아닌데.
지금 쓰는 원고 작성만 다 마치면, 저녁에 밥이나 먹자고 해야겠다.
“오빠, 오늘 저녁 괜찮으면 밥 같이 먹어요.”
세 시간째 답장이 없다. 평소 같았으면 문자를 보낸 지 오분 이상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을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재훈은 한 시간 이내로는 꼭 답장을 해주었다.
나는 열두 시간 이내로만 답장해주면, 빠른 편이라고 재훈이 말했다.
휴대폰을 매트리스 구석에 던져 놓아서 재훈에게 온 문자를 삼일 넘게 못 본 적도 많았다.
일명 ‘땅굴 주기’일 때 그렇다. 땅굴 주기란 주로 생리 전 호르몬의 변화, 또는 원고 마감 이후 급격한 에너지 소모로 인해 찾아오는 멘탈 붕괴 타임이다.
“너, 일에 집중하느라 휴대폰을 바로바로 못 보는 건데 난 전혀 서운하지 않아.”
재훈은 내가 답장이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 언제나 이렇게 말해주었다.
여섯 시간 째 답장이 오지 않는다. 혹시, 뭐가 잘못 됐나? 렉이라도 걸린 건가?
휴대폰을 재부팅해보았다. 문제는 없다. 기다리는 문자 대신 스팸 문자만 잔뜩 들어오고 있다.
전화도 받지 않는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 종일 문자 한 통 없던 적은 없었는데. 게다가 오늘은 일요일이다. 쉬는 날, 뭐가 그리 바쁘다고. 재훈도 내가 하루 종일 연락 한 통 없을 때는 이런 심정일까?
“아, 하루 종일 연락 못해서 미안해. 뭣 좀 하느라고.”
11시 57분. 드디어 답장이 왔다. 왜, 이제야 연락했느냐는 문자를 보내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 나중에 말해주려고 했는데 궁금해?”
“네, 연락이 하루 종일 없어서 걱정했는데. 전화도 했고.”
“아, 나도 일에 집중하니까 휴대폰은 전혀 신경도 못 썼어. 지운이가 일에 집중할 때 휴대폰 던져두는 거 이해되던데.”
“그니까 무슨 일을 했는데요?”
목소리 톤이 높아지려고는 걸 감추기 위해 애썼다.
“어, 궁금해? 나 걱정했어? 나 관심받고 있는 거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 나 왜 자꾸 화를 내려고 하는 거지? 난 기본적으로, 다정하고 친절한 성격이라고.
남자친구한테 매일 화를 내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보니까 곧 화이트 데이더라고. 그래서 사탕을 넣은 수제 초콜릿을 만들어 줄까, 칵테일을 넣은 수제 초콜릿을 만들어줄까 생각했지. 근데 뜻대로 잘 안 되는 거야.”
“그거 만드느라고 하루 종일”
“응, 하루 종일, 정신없었어. 초콜릿 액체가 가스레인지에 들러붙어가지고, 그거 뒷수습하느라 힘들었어.”
지난번에 크림 파스타 만든다고 했을 때는 하루 종일. 사진 보내며 생중계해줬는데 오늘은 정말 초콜릿 만들기에 푹 빠졌나 보다. 초콜릿이 들러붙은 가스레인지 박박 닦으면서 쩔쩔매는 재훈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오빠, 우리 화이트 데이에 커플링 하러 갈까요?”
“어? 근데 너 일할 때 반지 신경 쓰여서 싫다며?”
“일할 때는 빼놓으면 되지. 심플한 걸로 하나 해요, 그럼.”
“꽃반지 같은 거 할까?”
“재밌어요?”
“아니.”
“그럼, 우리 동네 새로 들어온 쇼핑몰 알죠? 거기서 봐요.”
“왜? 좀 더 멀리 나가지? 맨날 동네에서 다 하려구.”
“여기도 있을 건 다 있어요. 이젠 여기도 변두리가 아니라 서울시 교통의 요지라고.”
“그건, 동네 자부심이야? 아니면 멀리 나가기 싫은 귀차니스트의 핑계야?”
재훈이 나를 놀렸다.
“그럼, 네가 원하는 커플링 디자인 생각해보고 있어.”
그렇게, 우리는 화이트 데이에 커플링을 맞췄다.
“고객님, 이거 반지 사이즈, 정말 줄이시게요? 지금 딱 좋은 거 같은데.”
“아니에요. 이거 제 손가락이 지금 부어서 그래요. 어제 라면 먹고 잤다구요.”
“아, 네. 저도 손가락이 아침, 저녁으로 좀 붓긴 해요. 반지 사이즈는 그런 것까지는 다 고려해서 끼시는 게 좋아요.”
“이거, 남자친구하고 와서 반지 맞추었을 때는 사이즈가 딱 맞았는데, 그 이후로 묘하게 헐거워지고 있다구요. 이러다가 지하철 같은 데서 반지 잃어버리면 어떡해요? 이건 제 첫 커플링이란 말이에요.”
“고객님? 제가 볼 때는, 지금은 반지가 안 빠지는 걸 더 걱정해야 할 거 같은데요? 반지가 안 빠질 때는 핸드크림을 좀 발라서 살살 돌리면 좋아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왜 오늘 손가락이 부었지? 평소엔 반지 알이 막 돌아간다니까요.”
나는 민망함을 감추려고 일부러 크게 웃었다.
“네, 고객님, 그럼 다음에 반지가 헐거워질 때 다시 와주세요.”
지금은, 점원 말대로 손가락에서 반지가 안 빠지는 걸 걱정해야 할 것 같다.
핸드크림을 왼쪽 넷째 손가락에 바르며 굳게 다짐했다.
“다음번엔 절대 밤에 라면 먹고, 여기 오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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