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찬란한 명절: 4편 이기자 이야기(상)

인절미 패밀리

by 이야기술사

오색찬란한 명절 : 4편 이기자 이야기

인절미 패밀리 (상)


‘먹을 게 하나도 없네.’ 타령으로 주말이 시작되었다.

아이들도 남편과 나도 그 말에는 대부분 동의했다. 냉장고 안은 이런저런 것들로 가득했지만 먹을 만 한 것은 없었다. 그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서 반짝하고 떠오른 것이 있었다.

“인절미!”

속으로 생각한 것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아이들은 내가 늙어가는 징조라고 했다. 그 근거는 아이들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는 늘 혼잣말을 다 들리게 한다고.’ 연심이 주장했고 무심이 동의했다. 잠깐 딴생각을 하던 중이라 남편과 아이들이 나를 보고 있는 줄 몰랐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게, 구정 때 일산에서 가져온 거 있잖아.”

내 목소리가 들뜬 것 같았다.

“에이, 안 먹어.”

연심이 실망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화를 내기 전에 무심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녀석은 별말 없었지만 그렇다고 관심이 있어보이지도 않았다. 녀석의 고개가 그대로 제 핸드폰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남편과 눈을 마주쳤다. 남편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차피 그는 뭣이든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먹지 마! 나 혼자 다 먹을 거야. 프라이팬에 구워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나는 연심이 뒤통수에 대고 보란 듯이 소리를 질렀다.

“엄마 떡 안 먹잖아요. 그리고 프라이팬에 떡 구워 준적도 없고.”

연심이 입을 뾰족하게 내밀며 투덜거렸다.

남편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연심이 말이 사실이었다. 평소 나는 떡을 잘 먹지 않는다. 게다가 오래된 떡을 프라이팬에 구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순전히 친정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라 입에 올린 것뿐이었다. 하지만 입에 올린 이상 엄마의 말은 사실이 되어야 했다. 나는 내 주장을 굽힐 수 없었다.

“아냐! 엄마가 얼마나 떡을 좋아하는데. 엄마 집에 혼자 있을 때 인절미 프라이팬에 구워 먹었거든.”

내 거짓말에 몰입한 나머지 너무 나가고 말았다.

사실 나는 문제의 인절미를 어디에 두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별로 걱정할 건 없었다. 오래 된 떡이야 냉동실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나는 말한 김에 냉동실 문을 활짝 열었다. 막막했다. 불투명한 그릇과 검은색 비닐봉지들이 냉동실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하는 수없이 그릇들을 하나씩 꺼내 살펴보려는데 남편이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구워줄까?”

어느새 남편은 불투명한 비닐봉지에 싸인 커다란 덩어리를 손에 들고 있었다.

순간 나는 안도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뭐, 그래도 좋고.”

나는 선심이라도 쓰듯 뒤로 물러났다.

남편이 봉지를 풀고 돌덩이처럼 굳은 인절미 뭉치를 꺼냈다. 한 시간 후에 우리 네 식구는 프라이팬에서 막 구워낸 인절미를 둘러싸고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참 사연 많은 인절미였다.


구정 연휴가 시작된 날이었고 구정 바로 전 날이었다.

나는 아이 둘을 다 데리고 일산에 갔다. 일산에는 시부모님과 아직 미혼인 시누이가 함께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있었다. 나는 큰며느리이기는 해도 명절에 대한 부담은 별로 없었다. 차례는 시골에 있는 큰댁에서 지냈다. 시댁에서는 가족들이 먹을 음식정도만 장만했다. 구정 전날에 가도 웬만한 음식은 시어머니가 다 마련해두곤 했다. 그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을 깨워서 앞장세웠다. 지난달 시댁에서 가져온 빈 반찬통을 담은 쇼핑백에 배 한 상자까지 들고 나자 빈손이 없었다. 전 부칠 때 입을 옷은 배낭에 넣어 어깨에 멨다. 한 달 가까이 휴일도 없이 현장에 있었던 남편은 오늘 하루 집에서 쉬라고 했다.

일산에 도착하자 맥이 풀렸다. 명절 연휴라 서울 시내에는 평소보다 차가 적었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았다. 거의 1시간 40분 가까이 걸렸다. 강변북로에는 중간 중간 정체구간이 있었다. 시어머니는 두 아이를 하나씩 안아주며 우리를 반겼다. 나는 신을 벗자마자 가져간 옷으로 갈아입었다. 예상보다 오는 시간이 더 걸렸다.

시어머니는 이미 전기 프라이팬을 꺼내놓았다.

작년 설만 해도 시어머니와 나는 주방 바닥에 신문을 깔고 그 위에 휴대용 가스버너를 올렸다. 일반 프라이팬을 불 위에 올려 어느 정도 달군 후 기름을 두르고 썼다. 충분히 가열했어도 동태 전을 부칠 때는 전이 부서지거나 모양이 엉망이 되곤 했다. 나는 전기 프라이팬을 사자고 주장했다. 부탄가스를 갈아 끼울 필요도 없다. 크기도 일반 프라이팬 두 개를 합친 것 보다 크다. 한꺼번에 전을 부쳐낼 수 있다. 가스도 새지 않아 여러모로 편리하다. 내 말에 시어머니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백 번의 말 보다 직접 사 가지고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금방 잊고 말았다. 추석 연휴 전날 시댁에 갔을 때였다. 시어머니가 커다란 박스에서 전기 프라이팬을 꺼냈다.

시어머니는 전기 프라이팬에 푹 빠졌다.

그 때마다 시어머니는 나한테 잘 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좀 멋쩍었고 죄송스럽기도 했다. 명절에 전 부치는 일은 내 몫이었다. 재료 준비는 모두 시어머니가 했다. 나는 부침가루나 계란을 입혀 굽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전기 프라이팬의 편리함은 고스란히 내 차지였다.

한참 전을 부치고 있을 때였다. 시어머니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머니는 통화를 하면서 내 얼굴을 돌아보았다. 통화를 끝내고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지금 구로동에 다녀 올 수 있겠니?”

구로동은 어머니의 큰 언니가 사는 동네였다.

“네? 지금요? 무슨 일인데요?”

나는 짐짓 놀라지 않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모 사돈댁에서 설이라고 인절미를 보냈는데 너무 많다고. 나눠준다고 해서.”

어머니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인절미. 그걸 가지러 일산에서 구로까지 갔다 와야 한다고? 나는 전기 프라이팬을 보며 느꼈던 어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

“어머니 우리도 인절미 있지 않아요? 지난달에 어머니도 인절미 뽑았잖아요?”

그랬다.

지난달 어머니는 아버지와 큰 아들이 좋아한다며 방앗간에서 인절미를 두 말이나 뽑았다. 우리 집 냉장고에도 그 때 가져온 인절미가 한 통은 더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너희 남았냐?”

나는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안 남았지? 그래도 이모가 준다는데. 시골에서 뽑은 거라 아주 맛있는 건데. 사돈이 직접 찹쌀 농사 져서 만든 거라고……그런데 택배로 오는 사이 곰팡이가 좀 생겼다고.”

어머니가 말끝을 흐렸다.

“네…….”

덩달아 나도 말끝이 흐려졌다.

“잠깐만 인아 지금 어디 있나 전화해 보자. 가까운데 있으면 좀 갔다 오라고 해야겠다.”

어머니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인아는 시누이 이름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제안에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나 보다 두 살이 적은 시누이는 자전거에 푹 빠져있었다. 오늘 같은 황금연휴에 동네 근처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시무룩한 얼굴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다행이 시누이가 전화를 받긴 한 것 같았다.

“아가씨 어디시래요?”

나는 일부러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좀 멀리 간 것 같더라. 아직 춘천이라고.”

어머니가 내 눈을 피했다.

생각보다 멀리 있었다. 오늘 돌아오기는 하는 걸까?

이대로 인절미를 가지러 안 갔을 경우를 예상해 보았다. 어머니는 인절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곰팡이가 핀 것일지라도. 어머니들은 다 그랬다. 친정 엄마라도 똑같았을 것이다. 집에 김치를 한 가득 해 두고도 김치 냉장고 한 칸이 비면 다시 김장을 하는 것이 어머니들이었다.

나는 프라이팬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녹두전을 보며 말을 꺼냈다.

“다녀올게요. 이 것만 하고 나서요.”

어머니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오색찬란한 명절: 4편 이기자 이야기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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