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찬란한 명절: 4편 이기자 이야기(하)

인절미 패밀리

by 이야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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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찬란한 명절: 4편 이기자 이야기

인절미 패밀리(하)


나는 기름 냄새가 베인 옷을 입은 채로 시동을 걸었다.

일단 이모 댁 앞까지만 가면 집에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될 터였다. 이모와 함께 사는 사촌 동서가 인절미 박스를 들고 나오기로 돼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이모님.”

나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전화를 걸었다.

구로에 들어오니 1시간이 조금 넘었다. 그나마 자유로가 뻥뻥 뚫렸다.

시이모는 바로 동서를 내려 보내겠다고 했다. 잠깐 올라왔다 가라고 하지 않아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머리며 군데군데 밀가루 묻은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그보다 귀찮은 마음이 더 컸다. 깜박이를 켜고 한 쪽에 차를 댄 다음 시동을 껐다. 잠시 창밖을 멍하게 쳐다보다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특별히 검색할 것도 없었지만 버릇이었다. 조금 뒤 이런저런 기사를 검색하고 있을 때였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사촌 동서였다. 나는 서둘러 창문을 내리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어서 오세요. 형님, 이거 트렁크에 실을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서둘러 차 트렁크 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박스가 컸다.

“이게 다 인절미예요?”

나는 트렁크에 있던 잡동사니를 한쪽으로 치우며 물었다.

“아뇨, 뭐 이것저것 메밀가루하고 도토리가루 나물 삶은 거 몇 가지랑 곶감 한 봉지 넣었어요.”

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뭐 내가 시댁을 나오기 전에 어머니가 싸 주신 것들도 그 비슷한 것들이었다.

나는 동서가 박스를 내려놓고 허리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져온 쇼핑백을 건넸다.

“어머 형님 이건 뭐예요?”

그녀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만두예요. 가래떡 조금이랑요.”

“만두요? 언제 이걸 다 만드셨대요? 형님 힘드셨겠어요.”

그녀가 쇼핑백을 받으며 말했다.

사실 나는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그 만두는 어머니 혼자서 구정 연휴 전에 만드신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굳이 동서에게 말하진 않았다.

그녀는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직장엘 다니면서도 집안일도 소홀히하지 않았다. 시키지 않아도 잘 알아서 하는 그녀였지만 시어머니가 일을 시작하면 꼼짝없이 같이 해야 했다. 따로 살면서 연휴 전 날에나 와 전 몇 가지 부치고 마는 내가 어쩐지 그래 보일 것 같았다. 잠깐 안부를 주고받다가 차에 올랐다. 쇼핑백을 한 손에 들고 서 있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 역시 내 옷차림과 비슷했다. 명절 전 날 며느리 패션이란 게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무릎 나온 운동복 바지에 편안한 티셔츠.

나는 백미러를 보며 차를 천천히 돌렸다.

내비게이션에 다시 시댁 주소를 입력하고 아파트 단지 입구를 막 나오려던 참이었다. 핸드폰에 어머니 전화번호가 떴다.

“네, 어머니. 이제 막 출발했어요.”

나는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보고를 했다.

“그래? 다행이다. 저기 이왕 나간 김에 말이다. 에미야 한 군데 더 들러도 되겠니?”

어머니의 목소리에 미안함이 한가득 묻어있었다.

“네? 어디를요?”

나는 브레이크를 천천히 밟으며 차를 한쪽에 세웠다.

통화가 조금 길어질 것 같았다. 비상 깜박이를 켜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렸다.

“그게 미안한데 작은 이모가 뭣 좀 준다고 해서.”

작은 이모라면 어머니의 여동생이었다.

그 집은 구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목동이었다.

“네, 어머니. 들렀다갈게요. 통화는 하신 거죠?”

나는 핸드폰을 끄고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바꿨다.

어머니는 작은 이모가 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게 뭔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목동까지는 금방이었다. 차를 주차장에 넣으며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올라가야 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작은 이모네는 예정에 없었기 때문에 내 두 손은 비어있었다. 그래도 명절 인데 빈손으로 올라가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다가 마트에라도 들렀어야 했나? 다시 내려갔다 올까? 아니다. 금방 올라가겠다고 전화를 했다. 이런저런 생각 중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어서와 질부. 이거 받아!”

문 앞에 시이모가 나와 있었다.

어머니 보다 열 살이나 어린 동생이었다. 게다가 나이 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외모 때문에 조금 과장하면 내 선배 정도로 보였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시이모가 주는 보따리를 받았다.

“어서 가! 바쁘지. 나 들어간다.”

그제야 나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떠올라 허리를 깊게 숙였다.

감사하다. 명절 잘 보내시라. 뭐 이런 말을 두서없이 하는 도중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렇게 1층 까지 내려와서야 나는 쇼핑백을 살짝 펼쳤다.

“뭐야! 인절미야!”

나는 그 자리에 멈췄다.

어머니가 작은 이모가 준다는 것이 뭔지 말을 안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댁에 도착하니 날이 저물었다. 전화를 걸었다. 두 이모 집에서 준 인절미를 다 들 수 없었다. 시아버지가 나왔다. 아버지는 별 말없이 박스를 들고 앞장섰다. 나는 쇼핑백을 들었다.

시어머니는 현관문 앞에 나와 있었다. 나를 보더니 얼른 내 손에서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내가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어머니가 눈을 꿈쩍거렸다. 아무 말도 말라는 신호였다. 시아버지는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시댁 냉동실에도 지난달에 한 인절미가 남아 있을 터였다.


“고생했다. 저녁 먹어야지?”

어머니가 쇼핑백을 한쪽 구석에 두며 말했다.

“뭐 급한 일이라고 애를 구로까지 보내고.”

아버지가 끙 하며 한 마디 했다.

만약 내가 인절미를 가지러 두 이모 집에 간 걸 알면 큰소리가 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어쩌면 한 달 내내 인절미만 먹으라는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그 때 깨달았다. 우리 집 냉동실을 비워야 한다는 걸. 그 안은 인절미 봉지가 차지할 것이다. 추석 때 가져 온 전이며 몇몇 명절 음식도 냉동실에 그대로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떡국 떡이며 잡채, 만두에 시골에서 온 인절미와 작은 이모가 준 인절미까지.

그 날 늦은 저녁을 먹고 치우려고 할 때 아가씨가 돌아왔다.

자전거를 얼마나 탔는지 한겨울에도 얼굴이 까맣게 탔다.

“언니 오셨어요. 참! 엄마 큰 이모랑 작은 이모가 인절미 보냈다며? 그거 우리 집에도 많잖아요.”

눈치 없는 시누이는 신발도 벗지 않고 폭탄을 터트렸다.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어머니 얼굴을 보았다.

나는 뭐라도 해야 했다.

“아녜요. 아가씨. 인절미는 큰 이모가 나물 보내시면서 몇 개 주셨고 작은 이모는 곶감 보내셨어요. 곶감이랑 묵 쓰라고 메밀가루 주셨어요.”

나는 시골 인절미를 몽땅 우리 집으로 가져갈 결심을 한 터였다.

작은 이모가 준 인절미 쇼핑백은 그대로 친정집에 보내면 될 것이었다.

“어 맞아, 메밀가루. 너 얼마 전에 묵밥 해먹자고 했잖아.”

시어머니가 어색하게 맞장구를 쳤다.

시아버지가 못마땅한 얼굴로 한 마디 했다.

“사면 될 걸 가지고 애를 그 먼데까지 보내고 쓸데없이.”

됐다.

이제 눈치 젬병인 시누이 입을 막을 차례였다.

“아가씨 얼른 씻으세요. 저녁 먹어야지.”

나는 그대로 일어나 시누이 자전거를 함께 들었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조용히 타일렀다.

“암 말 말아요. 인절미는 내가 몽땅 가져갈 거니까. 모르셨어요? 나 인절미 킬러인거?”

그제야 시누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시어머니는 밤늦게까지 인절미 겉에 핀 곰팡이를 털고 고물을 걷어냈다. 그리고 먹기 좋게 잘라서 일일이 봉지에 따로 넣어주었다.


남편과 두 아이는 제 양보다 인절미를 많이 먹었다.

금방 구워낸 떡은 내 예상보다 훨씬 맛있었다. 인절미는 시어머니의 욕심으로 냉동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법자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 떠올리기만 해도 배부른 비상식량이 되었다. 배는 기분 좋게 불렀고 날은 따뜻했다. 등 따습고 배부르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 오색찬란 명절: 4편 이기자의 이야기(하)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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