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연애 : 소유주의 이야기

빛바랜 사진, 빛나는 오늘

by 이야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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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연애 : 소유주의 이야기

- 빛바랜 사진, 빛나는 오늘


창고 문을 열었다. 입을 굳게 다문 캐리어 두개가 눈에 들어왔다. 크지 않은 두개의 캐리어는 내 마음만큼 무거웠다. 자꾸 엇나가는 바퀴를 바로 잡으며 겨우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수많은 편지들과 일기장들. 그리고 빛바랜 사진들. 한숨부터 나왔다. 무엇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대책이 서질 않았다.

자취방에 있던 짐들을 신혼집으로 옮기면서 버리지 못한 물건들이었다. 오래된 캐리어에 눌러 담은 종이들은 각자의 시간을 껴안고 뒹굴고 있었다. 난 늘 무언가를 버리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시간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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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더미에서 유난히 밝게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보였다. 군복을 입은 그 사람의 손이 내 왼쪽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장거리 연애, 뒤늦은 입대. 기다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계속 사랑하고 있을 뿐이라고, 내 시간이 그 사람을 위해 희생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함께 할 미래를 그리며 퇴근 후에 밤새워 이력서를 쓰고 그가 밝게 빛날 수 있도록 자기소개서를 몇 번이고 수정했다. 대기업 입사 소식을 알리는 그의 목소리에 내 일 마냥 기뻐했다.

그리고 우린 헤어졌다.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지만, 밀어낸 건 그였다. 연락을 할 때마다 바쁘다던 그는 사랑할 시간마저 없었다. 사진을 찢어 버릴까 태워 버릴까 한참을 고민하다 그냥 두기로 했다. 사진을 보는 것마저 아파서 눈물이 나던 때는 이미 지났다. 어리석은 과거의 나도 지금의 나의 일부이므로.

옥상에는 햇볕이 내리 꽂히고 있었다. 이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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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넣어두지 않아 미지근한 소주병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지만 발소리를 들은 것인지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 지운. 통성명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임대차 계약서에서 보고 알게 된 그녀의 이름. 그녀가 마주 앉자마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그녀의 미간 사이에 주름이 잡혔다. 반갑지 않은 문자인 듯했다.

"제가 이상한 걸까요?"

지운이 먼저 말을 건넸다. 난 대답 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본인이 이상한지 이상하지 않은지를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님은 알고 있다. 그저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전 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해요.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나 쉬고 있을 때는 방해받고 싶지 않고요. 그런데 이 남자는 갑자기 만나자고 불러내거나 바쁘다고 해도 계속해서 문자를 보내요. 일대일의 관계를 약속했다고 해서, 이런 것들을 다 받아줘야 하는 걸까요?”

지운은 고민을 털어놓고 난 뒤의 후련한 표정이 아닌 하고 싶지 않은 말을 내뱉은 사람의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받아준다고 생각하면 지운 씨가 지쳐버릴 거예요. 그냥 두세요. 지운 씨 남자친구분은 그저 사랑하고 싶은 거예요.”

지운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욕심이더라고요. 내 마음을 상대가 알아주길 원하는 것도 무리였고요. 그저 마음껏 사랑하게 내버려 두세요. 그러다가 남자친구분이 지치기 전에 지운 씨의 마음이 열리면, 그게 바로 인연이겠죠.”

빈속에 술을 마셔서였을까. 취기가 오르더니 옥탑 지붕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을 본 이후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인기척에 눈을 떠보니 침대 위였다. 남편의 잠옷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거야?”

대답을 하려고 입술을 떼는 순간 지독한 갈증이 밀려왔다. 남편은 들고 있던 물컵을 내밀었다.

“당신 술주정하더라?”

술주정이라니. 지금껏 술을 마셔도 그런 적은 없었다.

“일단 이리 와서 속 좀 풀어.”

부엌에는 북엇국과 밑반찬이 놓여 있었다. 주걱으로 밥을 퍼담는 남편의 모습은 낯설었지만 능숙했다. 북엇국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았다.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나니 조금 정신이 들었다.

“아기 천천히 가져도 돼.”

내내 말없이 마주 앉아 있던 남편의 말에 어제의 일이 조금씩 기억나기 시작했다. 지운 씨와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옥상에서 내려와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이런저런 말들을 한참 동안 했던 것 같다. 연애 기간도 짦았고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조금 더 있다가 아기를 갖고 싶다고, 회사에서 아무리 바빠도 문자에 답은 해줄 수 있지 않냐고. 그런 말들을 하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어제 일이 떠오르자 북엇국으로 풀린 속이 갑자기 울렁거리는 듯했다.

“내가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여자를 잘 몰라.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겠지만 남편이라는 역할도 처음이잖아. 결혼하면 아기를 낳아서 키우고 그러려면 더 열심히 돈을 벌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어제 당신이 내가 아직도 낯설다고 했을 때 많이 섭섭하더라. 내가 잘 몰라서 그래. 우리 앞으로 대화를 많이 하자.”

남편은 천천히 그러나 한마디 한마디에 따스한 무게를 얹어 말을 이어나갔다.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이 차려준 밥상도, 섭섭했다는 남편의 솔직한 말도 어색했지만 따뜻했다. 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다시 창고에 있던 캐리어를 꺼냈다. 낡은 편지들과 빛바랜 사진들. 가위로 자르고 또 잘랐다. 낡은 연애. 낡은 시간들. 중요한 건 지금의 나다. 내 일부였던 그것들을 잘라내고 나니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남편이 좋아하는 봄나물을 사서 무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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