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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Jul 01. 2017

[달.쓰.반] 64편/ 옥자(스포, 결말주의)

통역은 신성하다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문화 리뷰 No. 64

※ 주의 : 이 영화의 주요 장면 및 결말에 대해 언급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영화 <옥자>를 넷플릭스에서 보았다.  현재 멀티플렉스를 제외한 인디 극장에서도 동시 상영하고 있지만 <옥자>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알려진 만큼 새로운 플랫폼에 대한 기대도 나름 있었다.

결론은  <옥자>는 극장용 영화라기보단 인터넷 스트리밍용 영화라는 생각.  

두 영화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명확하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옥자에 대한 나의 전체적인 감상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데뷔작이었던 <듀얼>을

보는 느낌이랑 비슷했다.

<듀얼>은 극장용 영화는 아니고

TV용 영화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OCN에서 우연히 <듀얼>을 보고

극장용 영화와 TV용 영화의 차이는 대체 뭘까?

잠시 생각에 빠진 적이 있다.

물론 전체 제작 비용 혹은 배우 캐스팅 ,

촬영 장비, 상영시간 등등에 있어 

극장용 영화와 tv용 영화는

차이가 있고, <듀얼>과 극장용 영화를 비교했을 때

그 차이는 확연히 느껴졌지만

이건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아닌가.


신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데뷔작이었던

 tv용 영화와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봉준호 감독의 인터넷 스트리밍 영화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혹은 어떤 간극이 있는 것일까.

(사실, 별다른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이러한 쓸데없는 생각과 더불어


만약 봉준호 감독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가 이렇게 화제가 되었을까?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봉준호 감독이 아니었다면

틸다 스윈튼, 제이크 질렌할, 스티븐 연 등

다국적 배우가 출연하는 이 대규모 프로젝트가 가능했을까?


옥자가 대규모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듀얼>을 봤을 때의 느낌이라고 했던 것은

<옥자>가 소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게 소품이란 의미는 1회성 소비 콘텐츠를 의미한다. 

어머 이건 꼭 극장에서 봐야해!가 아닌,

집에서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그런 이야기들.


물론 소품이란 생각은 (인터넷 스트리밍 콘텐츠 업체인) 

넷플릭스 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넷플릭스라는 단어를

나는 내 머릿속에서 어떻게 통역해야 하는가.

내용적으로, 기술적으로 극장용 개봉 영화와 똑같다면 굳이 넷플릭스라는

이름을 달고 나와야할 이유는?


만약 완전히 새로운 플랫폼의 영화라면

기존 극장용 영화와 기술적으로(혹은 내용적으로) 무슨 차이점이 있다는 것인가.

(물론 많은 차이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영화만 봤을 때는 알 수가 없었다)

기술적인 차이가 있다면, tv로 넷플릭스를 보는 사람, pc로 보는 사람,

태블릿 혹은 휴대폰 앱으로 보는 사람 모두 제각각의경험을 할 수도 있고.)


그리고 만약 봉준호가 아닌 무명의 신인 감독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라며

<옥자>를 들고 나왔다면, 

나는 이 영화에 혹은 넷플릭스에 관심이나 가졌을까?

넷플릭스가 우리나라에 진출한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봉준호라는 이름이 없었을 때는 관심조차 없었다.


<옥자>에는 통역이 신성하다, 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대사를 하는 동물 보호 단체의 수장 제이는 동물보호와 전통의 신념을 외치면서

동료, 즉 인간에 대한 폭력은 서슴없이 행사한다는

점에서 나를 헉, 하게 만들었지만

어찌됐건 그가 외친 통역은 신성하다, 라는

단어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가끔 동생과 유치한 언쟁을 벌일 때가 있는데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지만, 그들의 신념은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동생은 채식주의자들의 논리가 이해가 안된다면서

그렇게 따지면 식물들도 살아있는 생명이니

먹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소리에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당황했던 적이 있다.

식물들도 사람을 알아보고, 사람의 손길을

느끼는데 왜 채식주의자들은 육식 고기만 먹지 말라고 주장하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옥자>를 바라본다면,

이 영화를 올바르게 통역하는 것일까?

나는 <옥자>가 단순히 자연보호, 혹은 육식반대 혹은 채식찬성 이라는 

메세지를 담기 위해만든 영화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옥자의 초반 장면 중 미자가 옥자를 목줄로 묶어 끌고가는 씬이 있다. 

처음엔 그 장면이 좀 의아했다. 옥자를 정말로 친 동생처럼 여긴다면

소유물처럼 목줄에 매어 끌고 갈 수 있을까?

(도시에서야 옥자가 모종의 이유로 흥분해 타인에게 갑자기 덤빌수도 있으니 그럴수도 있다지만)

자유롭게 풀어서 키웠다는 시골에서 왜? 

그 장면에 대한 의아함은 제 몸을 던져 미자를 구하는 옥자의 기특함에 묻혀 금세 사라지긴 했지만.  

미자는 위태로운 지름길에 옥자를 안전하기 데려가기 위해 목줄을 사용했지만, 

그 목줄은 결국 오히려 옥자가 미자를 구해주는 도구로 쓰였구나. 

여기서 옥자와 미자는 동등한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구나. 

(하지만, 내 의구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서야

초반에 품었던 의구심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미자는 낸시와 거래를 한다.

거래의 대상은 바로 옥자. 

미자에게 옥자는 가족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금돼지로 거래가 가능한 소유물인 것이다. 

그건 잔인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역설이다.

진짜 가족이라면, 어떻게 금전적인 대상의 거래로 볼 수 있지?라는 생각은

결혼도 어찌보면  서로의 교환 가치가 있을 때만

성사된다는 점에서 납득이 가능 장면이기도 했다.

(옥자가  인간이 아닌 단지 '동물'이기때문에 거래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결혼 제도 혹은 어떤 사회 에서의 '가족'의 구성원도 필요에 의해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꼭 금전적인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거래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미자와 옥자가 가족이 된 것도

태생적인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필요 즉 교환 가치에 의해서였다.



즉, 동생인 루시하고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옥자를 대상으로 한 거래가

언니인 낸시와는 즉시 성사 가능했던 이유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슈퍼돼지 콘테스트에 세워진 옥자는

루시에게 있어 쉽게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브랜드 가치, 그 자체였지만

(루시와 미자의 이해 관계는 서로 어긋났기 때문에 

거래가 불가능했지만)


낸시에게 옥자는 금전적인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팔아치울 수 있는 그저 평범한 슈퍼돼지 한마리에

불과했을테니.


그렇다면 이 영화는 금전적인 조건만 맞으면 무엇이든 사고 팔 수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를 담고 있는 영화일까. 

아니면  인간에 필요에 의해 때로는 생명으로 때로는 소유물로 규정되는 동물의 존재론적 영화일까.

혹은 도살장에서  옥자만을 구하고, 죄책감에 휩싸인 미자가 리틀 슈퍼돼지 한마리를 더 구하고

내 가족의 세계만이  아닌 공동체 사회로, 그 외연을 확장해나가는  

한 소녀의 성장담일까. 


그리고 통역은 신성하다,는 대사는

이 영화의 주제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인간과 동물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

서로 다른 대상 사이에 필요한 통역.

그렇기에 신성한 것일까.


그런데 통역은 신성하다. 를 외치는 집단은

때때로 왜 우스꽝스러운 것일까.

음모론적 스토리를 좋아하는 나는

동물해방전선이

흑막이거나 혹은 최후의 반전이 있을 거라

내심 기대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이들의 행동방식이 때로는

언행일치가 안되고 우스꽝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들은  적어도 노력이란 걸 하는 자였다.

 

영화 초반 내가 제이에게 품었던 알 수 없던 적대감

(아마도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이상주의자겠거니)은

제이가 미자에게 스케치북으로 사과하고

그녀를 구하려고 온몸을 내던지는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의 진심을 믿게 됐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의 메세지를

내 머릿속에서도 실수 혹은 의도적으로 오역한다고 해도 내게 큰 책임은 없을듯 하다.

번역은 반역이란 말도 있듯이

(이 경구가 이런 뜻에 쓰이는게 적확할지는 모르겠지만)

창작자의 손을 떠난 작품의 해석은

오로지 관객 혹은 독자의 몫이니까.


내가 이 영화에서 미자에게 반했던 순간은

그녀가 옥자를 만나기 위해

미란도 한국지사의 강화 유리를

온몸으로 던져 깨부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스턴트맨을 방불케 하는 행동력으로

옥자를 구하기 위해 직접 나선다.

비록 결말에서는

그런 미자마저 거대한 영웅 신화담의 주인공이 아닌

거대한 현실의 벽 앞에

최선이 아닌 차선을 택하는

작은 소녀의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국적 대기업을 상대로

기죽지 않고 거래를 시도하는

이 소녀를 결코 평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캐릭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적 메시지,

여러 장르를 혼합한 시원시원한 추격씬.

세계 현실정치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치는 톱배우들.

이 모든 것이 <옥자>에는 있다.


하지만,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어야 해,

혹은 다시 한번 극장에서 보고 싶다, 라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결정적 한방이 없는 

이 영화의 총체적인 자체 역량에서 기인한 것일까.

아니면 내 안의 편견 혹은 의도적인 오역에서 기인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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