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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Jun 27. 2017

[달.쓰.반] 63편/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소설집, 창비, 2016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문화 리뷰 No. 63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싶지가 않은 것이다. (p.176 <실내화 한 켤레>)



올해 상반기는(아직 며칠이 남긴 했지만) 다른 어느해보다도 유난히도 힘들었다.  

한 가지 일만 겪어도 힘든데, 그에 버금가는 일들까지 한꺼번에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

나는 권여선의 소설집에서 읽었던 저 위의 문장을 생각했다.


꽤 오래전에 추천받았던 책이었음에도,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은,

무언가 견뎌낼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이든 견디고, 버텨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불행.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이 불행일까. 그렇다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는 불행일까. 아니면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불행일까. 그것도 아니면,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불행일까.


이런 문장도 떠올랐다.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P.136 <카메라> )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꽤  자조적인 감정에 취해있다가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불행을 견디는 자들의 숭고함에 건배를 보내게 됐다.

(동시에 나의 불행은 불행이 아니었구나, 라는 유치한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래도 제목이, <안녕! 주정뱅이>인데 이 책을 읽는 동안 술 한잔도 마시지 않은 건 아쉽다.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었으니 술을 마실 틈이 없었다)


<안녕, 주정뱅이>라는 제목답게, 이 책의 단편들에는 술에 취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요양원에 있는가 하면,

예술가 레지던스에서 환각에 취하기도 한다.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

<봄밤>의 첫 문장이다.

아이를 빼앗기고 알코올 중독자가 된

봄밤의 영경보다 나로 하여금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인물은

바로 '이모'다.

<이모>는 화자인 나의 시이모다.  시이모는 병문안을 온 조카며느리인 나에게 자신을 이모, 라고

부르라고 하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그후 나는 이모의 집에 간간이 들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의 삶을  '신산하다'라는 단어 하나로 압축할 수 있을까?

가족들에게 착취당하는 삶을 살던 이모는

그들의 곁을 떠나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췌장암에 걸린다.

하지만, 이건 단지 줄거리를 쓰기 위해 이모의 삶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


이모로부터 한달 생활비로 35만원을 쓴다는 이야기를 들은

내가 두번째 방문 때 커피와 케이크, 맥주와 담배 같은 것을 잔뜩 사가지고 가자

이모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좋은 생각으로 사온 건 안다. 하지만 나는 내 가난에 익숙하고 그게 싫지가 않다.

우리 서로 만나는 동안만은 공평하고 정직해지도록 하자. 나는 네가 글을 쓴다는 것도 좋지만

내 피붙이가 아니라는 게 더 좋다. 피붙이라면 완전히 공평하고 정직해지기는 어렵지.

혹시라도 네가 내 집에 뭘 몰래 두고 가거나 최악의 경우 돈 같은 걸 놓고 간다면

내가 얼마나 잔혹한 사람인지 알게 될 거다. 네가 먹을 간식을 사오는 건 괜찮아.

대신 다 먹고 가긴 해야겠지."


그뒤로 나와 이모는 두달 남짓 월요일 오후에 묽은 블랙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모는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나는 조용히 듣는다.


그녀의 아파트 보증금과 통장에 남은 현금은 그녀가 유언장에 써놓은 대로 상속되었다.

원래는 가장 우선순위인 시외할머니에게 모두 상속되어야 했지만, 그녀는 시외할머니에게 1/3,

시어머니에게 1/3, 그리고 태와 내게 1/3을 상속한다고 지정해놓았다.

시외할머니는 우리가 합의하여 맏딸의 유산 전부를 외아들 빚을 갚는 데 쓰기를 바랐지만

시어머니는 단호히 거절하고 우리가 그토록 사양하는데도 우리 부부의 통장에 이모의 유산을

입금했다. 통장에 입금된 여덟자리 숫자를 보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한달에 35만원씩만 쓰던 그녀가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다니 그 숫자들은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 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졌다.   (p.107 <이모>)


<이모>를 처음 읽었을 때는, 한숨이 나왔고.

두번째 읽었을 때는 가슴이 쿵, 했다.


이모는 숭고하게, 품위있게 자신의 방식대로

인생의 마지막을 보냈고, 나는 그런 이모를 떠올리며

이모와 나 사이의 '불가촉 거리'에 대해 생각한다.


마지막 방문 때

"불가촉 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라고 말하던 이모.

이모를 떠올리며 통장에 입금된 숫자를 오래들여다보던 '나'처럼

나 역시 이 소설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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