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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Aug 18. 2018

[달.쓰.반] 76편/당선, 합격, 계급

문학상과 공채는 어떻게 좌절의 시스템이 되었나(장강명 르포/민음사)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문화 리뷰 No. 76


장편소설공모전과 기업의 공채 제도는

지극히 한국적인 인재 채용 방식이다.

거액이 걸린 장편소설공모전을 이렇게 많이,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정부나 기업, 공공기관이 대규모 동시 시험을 통해

신입 사원을 뽑는 나라도 드물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한국적인 인재채용 방식은

과연 공정한가? 효용성은 있는가?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다각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견해를 말한다.

먼저, 제1장 <장편소설공모전>이라는 시스템은 이 책의 취재 방향과 대상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p. 17

이른바 ‘등단’을 하지 않고 작가가 되면 불리한가?

불리하다면 어떤 점이 불리한가? 등단을 하지 않은 작가에 대한 차별은 실제로 있나?

‘문단 권력’은 존재하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또는 필요악인가?

그런 질문을 던지는 동안 문학공모전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이것은 어떤 시스템의 일부이다.


p.19

문학공모전에 대한 이런저런 의문들은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시스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또는 이런 질문.

이런 시스템이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입시-공채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중략)


그런데 그런 질문에 내가 잘 대답할 수 있을까?

나는 문학공모전의 수혜자다. 아마 2010년 이후 최고의 수혜자일 거다.

그런 내가 문학공모전에 대해 공정한 글을 쓸 수 있을까?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좋은 시스템이라는 결론을 머릿속으로

미리 내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게 되지 않을까?‘

‘문학상에 당선된 소설치고 좋은 작품 없었다.’는 의견을 내가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은가.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 학벌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지닐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조차 입 밖으로 말하지만 않을 뿐, 속으로는 ‘똑똑한 학생들은 명문대에 압도적으로 많다’고 믿는다.

하나 다행인 것은 이 시스템을 중립적으로 평가하기란 어느 누구에게도 가능하지가 않다는 점이다.

객관적인 입장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취재는 살인 사건이 아니라 비리 의혹을 조사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건 취재가 아니르 시스템 취재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시스템 안에 있으니까, 외부의 시선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대졸자에게는 대졸자의 입장이, 고졸자에게는 고졸자의 입장이 있다.

한쪽 의견이 은근한 우월감과 시스템이 정당하다고 믿고픈 기대에 휘둘릴 수 있다면,

다른 쪽 의견은 피해 의식으로 왜곡 될 수 있다.

외국인 관찰자라 해도 마찬가지다.

이 취재는 시스템을 내면화한 사람들에 대해 뭔가 말해야 한다.

그런데 그 내면에 대해 국외자는

"이곳 문화는 진짜 이상하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틀에 맞춰 해석하는 것이 고작이다.

아이티에 간 인류학자가 부두교에서 옛 흑인 노예들의 아픔을 읽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작 부두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령은 실제로 존재하며,

인류학자가 그 신령의 세계를 보지 못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스템을 취재하려는 자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저런 한계와 선입견을 지니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시스템 중심부에서 주변부를 취재하는 게 그 반대보다 쉽다.

중심부는 주변부의 접근을 잘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졸자가 고졸자의 삶을 취재하는 게 그 반대보다 더 쉽다.

미등단 작가보다는 내가 주요 출판사 대표와 문학상 심사위원들을 인터뷰하기가 나을 거다.

변명거리는 하나 더 있었다.

내가 취재한 내용이 최소한 1차 자료로서의 가치는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신문기자로 10년 이상 일했다.

저널리스트로서 기본 교육은 잘 받은 편이라 자부한다.

몇번 특종도 했고, 기자상도 여러 개 받았다.

선입견을 갖고 인터뷰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인터뷰이가 한 말을 왜곡하지는 않는다.

내가 문학공모전에 관계된 사람들을 다양하게 인터뷰하고 이런저런 수치와 자료를 모아

책으로 쓰면, 최소한 기록으로서의 가치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p.108~109

대기업 공채는 어떨까?

몇 년 전 한국 대기업들은 필기시험에 역사 문제를 내고 있다.

현대 자동차는 2013년 하반기 대졸 공채부터 인.적성 검사에 역사 에세이를 도입했다. 정몽구 회장이 경영 회의에서 ‘글로벌 인재의 핵심 역량은 뚜렷한 역사관”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첫 해에는 응시자에게 “고려, 조선 시대 인물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과 그의 업적을 설명하고 이유를 쓰시오.”와 “세계의 역사적 사건 중 가장 아쉬웠던 결정과 자신이라면 어떻게 바꿀지 기술하라”는 두 문항중 하나늘 선택하게 했다. 이후에 나온 문제들은 “한국 위인 가운데 역사적으로 저평가된 인물을 재조명하라”이거나 “석굴암, 불국사, 남한산성 등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한국 문화 유산 중 두 개를 골라 설명하라” 등이었다.

(이 책 초고를 교정중인 2018년 3월, 현대자동차는 입사시험에서 역사 에세이를 빼겠다고 발표했다. 원래 의도와 달리 현대차 입사 준비 사교육이 성행하는 등 사회적 비용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중략)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기업들이 구직자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역사와 인문 소양을 갖춰야 진짜 창의적인 인재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몇몇 신문은 칼럼으로 ‘기업이 정부보다 역사의 중요성을 더 잘아본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하거나 ‘기업이 단순히 인문학 소양이 있는 이공계 학생을 가리는 수준에서 벗어나 인문학과 산업의 진정한 융합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나는 의견이 다르다. 자동차 회사에 필요한 글로벌 인재는 역사관이 뚜렷한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를 잘 만들거나 자동차를 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구직자의 논리력이나 표현력을 보고 싶었다면

 고려, 조선 시대 인물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율 운행차나 카 셰어링 문화가 가져올 변화에 대해 물었어야 한다고본다.


p. 264

이쯤에서 내 경험을 이야기 해볼까 한다.

내가 처음으로 처음으로 문학공모전에 도전했던 것은 20대 초반이었다. 그때는

단편소설을 써서 신춘문예에 보냈다.

그런데 다 떨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면서 한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다.

서른 즈음에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장편을 썼다.

내가 신춘문예 응모 자격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성작가는 신춘문예에 원고를 보낼 수 없는 줄 알았는데, 나는 그놈의 <클론 프로젝트.를 출간했으니까.

실은 내가 규정을 잘 몰랐던 거였다.

상당수 신문이 그런 제한을 없앴다.

손보미 소설가는 2009년 계간 <21세기 문학>에서 단편소설 부문 신인상을 받고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또 당선됐다.


p. 266

나는 그때 이미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인 <표백>과 단편집 <뤼미에르 피플>을 출간한 작가였다. 그런데도 고를 보낸다음에 출판사 담당자들로부터 ‘원고 잘 받았다, 검토해 보겠다’는 의례적인 답장을 받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런 형식적인 답이라도 해준 출판사는 몇 곳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 실제로 내가 보낸 원고를 검토해 자기들 마음에 들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나중에 알려준 출판사는 2015년 상반기까지 딱 세곳이었다. 그런 연락도 금방 오지는 않았다. 몇 달 씩 걸렸다. 그런 과정을 거쳐 실제로 출간이 된건 <호모도미난스>한편 뿐이다.

<열광금지, 에바로드>는 퇴짜를 맞았다.

(중략)

<열광금지, 에바로드>는 그때 이미 수림문학상에도 보낸 상태였다.

출판사에 투고한 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공모에도 지원한 것이다.

수림문학상은 온라인으로 접수를 받으니 우푯값도 안드니까.

그래서 30대 편집장이 본 원고와 수림문학상 응모 당시의 원고는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편집장과 만나고 나서 한 달 뒤에 뜻밖에도 수림 문학상 당선 연락을 받았다.

나도 아내도 정말 놀랐다.

(중략)

그 편집장을 비난하고자 이 일화를 소개하는 게 아니다.

그는 후배 편집자들의 존경을 받는 성실하고 유능한 이였다.

글을 고르는 감각도 뛰어났다.

그러나 그에게도 독서가로서 편집자로서 그만의 개성이 있다.

취향이라고 해도 좋고, 안목이라고 해도 좋다.

<열광금지, 에바로드>는 그와 맞지 않는 작품이었다.

공모전은 통한 신인 선발 방식에는 구조적인 이유로 허점이 생긴다.

하지만 투고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더구나 한국 출판사에서 투고 시스템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중에 나는 몇몇 편집자들에게 내 경험을 토로했다.

투고 원고에 답장하는 게 그렇게 힘드냐고. 한국 출판사들은 왜 투고 원고를 잘 살피지 않느냐고 따지듯 묻기도 했다. 대답은 한결 같았다.

너무 바빠서 투고 원고를 살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소설 공모전에 모범 답안이 있는가?

p.220  인터뷰

등단을 준비하는 동기들이 많은가요?

(중략)

대학원 가기는 애매하고, 졸업한 다음에 취업 안 하고 등단할 준비 생각을 하면 막막하니까 더 학교 다닐 때 등단하고 싶어하죠. 그런데 학년이 올라가면 포기하는 친구가 많아져요. 그래서 수업 분위기도 달라져요. 1,2학년 때는 합평을 하면서 서로 얘기하고 싶어하고, 공격도 하고 전쟁 같은데, 3,4학년이 되면 '선생님이 시키면 말고 아니면 뭐'라는 식으로.


(중략)

문학 공모전용 작품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세요?

(중략)

그게 공모전마다 다른 것 같은데, 신춘문예는 새롭다기보다는 문장이나 플롯에서 흠잡을 데 없고

단련되어 있어 보이는 게 중요하죠.

한국 단편소설에서 많이 보이는 정형화된 플롯 같은 거 있잖아요. 익숙한 구성, 안정적인 문장.


미등단작가는 차별 받는가.

p.211

(중략)

어차피 작가님 책이 곧 나오잖아요. 그러면 저자가 되는 건데요. 그럼에도 장편소설 공모전을 준비하는 이유가 뭔가요?


등단이라는 게 '제도권의 인정을 받았다'는 느낌을 주잖아요. 한국에서 등단을 못하면 정식 소설가가 아니라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 인정을 받기 위해서 공모전에 응모하는 건가요?

상금 때문이 아니라?

네.


p.272

“문예창작기금이나 해외 레지던스 프로그램 같은 거요.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들은 응모자격이 모호하게 써 있는곳이 많더라고요. 어디에는 ‘책을 낸 사람’이라고 조건이 나와 있는 곳도 있고, 어디에는 등단이라고 돼 있는 곳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전해들은 바로는, 알음알음 추천한 순서대로 돌아가며 등단한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다보니 등단한 사람이 아니면 어차피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중략)

“문단에서는 저를 거론하지도 않고 아예 평가자체를 안해요. 문단의 관심이 아쉬우냐면 그건 전혀 아니지만.... 이름난 국내 문학 출판사들이 마케팅 행사는 저랑 하고 싶어 해요. 예를 들면 다른 저자의 북토크를 할 때 사회자로 저를 부르죠. 모객용이죠. 하지만 그 출판사들이 발간하는 문예지에서 저에게 원고를 청탁해온 적은 없지요.”

임 작가도 문학공모전을 일종의 고시 제도라고 받아들였다.

(중략)

“한 기자분이 술자리에서 ‘우리 신문에 칼럼을 쓸 생각이 있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당연하죠‘라고 대답했더니 알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얼마 뒤에 안되겠다며 연락이 왔어요. 편집국장이 등단 작가가 아니면 곤란하다고 말했다는 거예요”

손 작가 역시 문학공모전 제도를 고시에 비유했다.

(중략)

유명 출판사에서 주는 문학상을 받은 뒤로 달라진 게 있느냐고 묻자 정 작가는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려줬다. 다름 아닌 호칭 문제였다.

“잡지에 글을 실으면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시인이라든가 소설가라든가 하고 직함을 적잖아요. 창비장편소설상을 받기 전에 있었던 일인데, 등단 작가들하고 나란히 원고를 게재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소설가’라고 쓰는데 저는 ‘작가’라고 적더라고요. 작가가 비하의 의미가 아닌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왜 나만 표기가 ‘작가’라고 돼 있나, 싶었죠. ‘너는 정식 소설가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은 기분? 2등 시민인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제는 그런 일이 없죠.”

(중략)

그리고 전에는 잡지에 글을 실으면 꼭 담당자가 물어왔어요. 등단 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어느 매체로 등단했다고 해야 하느냐. 저는 2010년에 <판타스틱>에 단편소설을 실은 게 데뷔라고 생각했는데, 문단에서는 그걸 쳐주는 사람도 있고 안 쳐 주는 사람도 있고 반반이더라고요. 그래서 잡지마다 표기가 다르게 나갔어요. 어디에는 <판타스틱>으로 등단했다고 나가고, 어디에는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고 나가고, 미등단이라고 나가는 곳도 있고. 그런데 창비에서 상을 받고 나니까 그 뒤로는 제가 ‘2010년에 <판타스틱>으로 등단했다고 해도 아무도 거기에 딴죽을 걸지 않아요. 그렇게 짜증나고 불편한 부분들이 있었어요.”


p.291

(중략)

"일단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누가 등단했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하는 편이고, <문학동네>에 단편을 실으면서 등단했다고 합니다. 그 전에 장편소설을 다섯 권 냈지만, 그걸로 등단했다고 하진 않았어요. 그냥 책을 냈다고 생각했고요. <문학동네>에 글을 실은 이후로 저에게 들어오는 일이 달라지고, 일 자체가 많아졌어요. 다른 문예지에서도 청탁이 왔고, 문단문학 평론가도 제 글을 언급하기 시작했어요. ‘문단’에서 청탁하는 작가의 목록이 정해져 있고 제가 그 리스트에 들어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중략)

그는 “한국의 문단문학 출판사들이 자신의 권위와 고료를 나눠 줄 작가를 아무나 선택할 수 없다고 판단한 다음, 일정 수준의 작가를 선택하는 기준선 같은 것을 만들었고, 되도록 그 안에서 작가를 선택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라고 덧붙였다.


p.285

매커니즘 자체는 굉장히 익숙하지 않나? 한국 사회가 명문대 출신과 비명문대 출신을 차별 대우하는 방식과 무척이나 흡사하다.

‘비명문대 출신은 절대 안돼’라는 팻말을 노골적으로 입구에 써 붙인 조직은 없다.

비명문대 출신도 능력과 실적이 굉장히 출중하면 인정을 받는다. 입사 시험에 합격하고, 승진하고, 조직의 장이 될 수 있다.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걸출한 인재라면.

그러나 그렇게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지 못하는 한 비명문대 출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배제를 당한다. 그들은 종종 명문대 출신과 같은 출발선에서 시합을 시작하지 못하며, 핸디캡을 져야 한다.


p.289

나는 그런 신비로운 권위들이 한국 사회 또한 마찬가지로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

문학 권력은 신비로운 권위 중 하나다. 학벌도 그렇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대기업 직원’이라는 신분도 그렇다.

(중략)

대체로 어떤 시험을 치고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그 신비로운 권위를 얻는다.

그 집단은 주류 문단일 수도 있고, 명문대일 수도 있고, 대기업일 수도 있다.

(중략)

이 신비로운 권위를 ‘간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p.292~293

어디까지가 명문대일까?

이화여대는 명문대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욕설과 악플이 수백개쯤

달릴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많다.

그보다 파괴력은 약하겠지만 이화여대 자리에 한양대나 중앙대를 넣어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게다.

(중략)

명문대의 지방 캠퍼스는 어떨까?

본교와 분교 재학생들 사이의 갈등은 수십 년째 현재 진행형이며, 해결될 기미가 없다.

이 논란에 관한 글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당사자들이 사용하는 살벌한 언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학벌 세탁, 기생수, 분교충, 역차별, 카스트,육두품, 순혈주의,눈칫밤, 서자와 같은 같은 말들이다.

편입이나 중퇴는 어떻게 봐야할까?

우습게도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초점을 두는 것은 졸업 여부가 아니라 대학 입학 당시의 성적이다. 박완서, 이문열, 박원순 등 서울대 중퇴자들을 서울대 출신이라고 표현할 때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반면 편입생들에게는 ‘편입충’이라는 멸칭이 붙는다.

경영대학원, 산업대학원,행정대학원,최고지도자과정,해외 대학의 원격 과정은 어떨까?

한국에서 어느 대학의 학부가 아니라 최고 경영자 과정을 마친 사람이 그 대학 동문인것처럼 행세한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대다수 대중의 반응은 ‘사기꾼’이라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여의도 같은 곳에서는 그런 직함이 찍힌 명함을 아주 많이 받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나도 이 책에 나오는 사례와 비슷한 일들을 겪기도 했고,

그래서 분노하기도 했고, 심하게 좌절하기도 했고

우리 사회의 인재 채용 시스템과

사회 전반에 만연한 엘리트 주의, 혹은 ‘간판’에 대한 집착에 관해

근원적인 의문을 가지기도 했는데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그때 가졌던 여러 가지 감정들이

수년이 지나서, 이렇게 책으로 정리되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학공모전과 대기업 공채에 대한 르포가 나올 것이리라고는.


저자는 문학공모전이라는 시스템의 한계와 근원적인 문제점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공모전의 문을 두드리지 말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공모전 선배로서, 공모전 도전을 격려해준다.


부록

p.435

공모전 제도가 미치는 영향력, 그리고 제도를 둘러싼 환경을 손봐야 한다.

나는 그런 지론과 별도로

공모전에 도전하는 많은 작가 지망생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 모두 공모전을 준비해야 한다면

그건 잘못됐다.

그러나 소설가가 되고 싶은 어떤 사람이 공모전을 준비하는 것은 아무 잘못도 아니다.


(중략)

소설공모전을 준비하는 분들게 내가 생각하는 팁과 그 이유를 몇 가지 정리해봤다.

이 조언들이 100% 옳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작가 지망생들 사이에 퍼져 있는 미신과 루머들보다는 훨씬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록키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중략)

저자의 조언은 공모전에서 11번 낙선한 정유정 작가, 최종심에서 아홉 번 떨어진 정세랑 작가, 신춘문예에 13번 낙방했다는 백영옥 작가의 예를 들며 낙선했다고 지레 좌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던 살롱전에 출품해 낙선했지만, 나중에는 인상주의를 이끌었던 화가 마네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에 실려있다.

그리고 여러 곳에 응모하되, 한 작품으로 낼 수 있는 곳에서 모조리 떨어졌다면 미련을 버리고 다른 작품을 준비하며 소설 쓰는 근육을 만들라고 조언한다.

단점을 고치기보다는 장점을 부각하고, 낙선했는데 심사평에 이름 언급돼봐야 좋을 것 없으니 가명으로 보내라는 실질적 조언도 첨부한다.


저자도 말했듯 이 책 한 권으로  우리나라 문학 공모전의 근원적인 문제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문제가 있구나, 하고 현실을 환기시켜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종의 간판과 스펙을 얻기 위해 치렀던 대학교 입시와 각종 공모전 준비, 기업 공채 채용 응시 과정에서 느낀 여러 가지 감정들(좌절과 분노와 피해의식, 갈망, 순응) 등이 내 일기장에만 존재하는 것들은 아니었구나, 라는 반가움과 동시에,

그렇다면, 이 견고한 철옹성 시스템의 변화를 위해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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