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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Mar 17. 2019

[달쓰반] 87편/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스포주의

제33회 선댄스영화제 월드시네마 섹션 관객상 / 감독 에르네스토 콘트레라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문화 리뷰 No. 87

 ※  주의 : 이 리뷰에는 영화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의 주요 장면 및 결말 등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제33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섹션 관객상을 받은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가

개봉했다.  이 작품을 상영하는 극장은 많지 않았지만,  마침 회사 근처인 서울극장에서 볼 수 있다기 브랜드데이인 수요일 퇴근 후 관람했다.

(매주 수요일 서울극장의 브랜드데이에 회원이 동반 1인과 같은 영화를 관람하면 1인당 5천 원으로 관람가능. 할인은 현장발권만 적용)


영화는 언어학자인 마르틴이 소멸 위기에 놓인 멕시코의 토착 언어 ‘시크릴어’를 구사하는 원어민 이사우로와 에바리스토를 찾아오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시크릴어를 구사하는 원어민은 이들 이외에도 한 명 더 있었지만, 그녀는 영화 초반 시크릴어의 유래를 마르틴에게 알려주고, 곧 '이상향'으로 떠난다.


이제 시크릴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단 두 사람뿐. 하지만 이사우로와 에바리스토는

한 여자(마리아)를 놓고 크게 싸운 뒤

 서로 말을 안 섞은 지 50년이 흘렀다.


마르틴은 시크릴어 연구를 위해 두 노인을 화해시키려 노력하고, 에바리스토의 손녀 주비아에게도 도움을 청하면서 그녀와 가까워진다.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는  주비아는 시크릴어를 모른다. 그녀는 시크릴어를 전수받을 생각이 없으며,  미국에 가서 일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다. 주비아는 마르틴에게 영어로 말을 건다. 마르틴은 주비아의 영어 문법 중 틀린 곳을 알려주며 두 사람은 유대 관계를 쌓아간다. 하지만 주비아는 할아버지인 에바리스토만큼은 이사우로와 남은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할머니인 마리아가 평생을 회한 속에 살아왔기 때문에 에바리스토만큼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손녀인 자신에게 두 노인이 음속 깊숙히 간직한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우로와 에바리스토 사이에  감춰진 비밀은 이 두 사람의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야 만다.

 잔뜩 화가 난 에바리스토가 이사우로의 집에 불을 지르러 갈 때, 마음 속으로 누가 좀 제발 말려! 라고 계속 외쳤다. 

다행히 마르틴과 주비아가 에바리스토가 이사우로를 불태워 죽이기 전에, 그를 구해주긴 했지만 마리아의 사진을 이사우로가 태운 것에 화가 난 에바리스토는 결국 이사우로의 집을 전부 태워버리고야 만다.


대외적으로는 한 여자를 두고

두 사람이 싸운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에바리스토와 이사우로는 사실,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다.

하지만 에바리스토는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데 비해, 이사우로는

스페인어를 모른다.

마리아가  스페인어를 모르는 이사우로에게 너 이래서 사랑고백은 어떻게 할래? 라며 조소하는 장면이 있다. 이미 이사우로와 에바리스토 사이에는 완성된 언어인 시크릴어가 있었지만 여기에 이방인의 언어인 스페인어가

끼어들면서 균열이 생긴 것이다.

에바리스토는  외지인으로 보이는 마리아와 결혼으로 융합하지만,이사우로는 에바리스토와 절교한 이후 마을과 떨어진 곳에 오두막 집을 짓고 은둔해 살아간다. 이사우로는 50년이 흐른 뒤에도 스페인어를 여전히 모른채 마을 아이들에게 미친 영감 취급을 받고 있다.

동성간의 사랑은  에바리스토가 받아들인

종교적으로도 용인되지 않았기에,

(에바리스토의 내면적 갈등은

 그가 피흘리는 예수상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극대화 된다)

에바리스토는 이사우로의 사랑을 결코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자신의 진짜 사랑 대신 자신을 내면의 죄로 부터 구원해줄 마리아를 택했던 것이다. 사랑 고백을 하는 에바리스토에게 마리아는 이사우로에 대해 묻는다.

마리아는 에바리스토와 이사우로의 키스를 목격했던 것이다.  두 사람 사이를 추궁하는 마리아에게 에바리스토는 이사우로가 자신을 억지로 몰아붙였다고 변명한다.

마리아는 에바리스토에게 진심으로 회개하느냐 묻고 에바리스토가 그렇다 고 대답하자 두 사람은 곧 연인이 된다.

이후 이사우로와 에바리스토는 격렬한 몸싸움을 벌인다. 그렇게 50년이 흐르고, 영원히 화해할 수 없었을 것 같은 두 사람은 마르틴과 주비아의 일로, 다시 시크릴어로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오직 두 사람만이 나눌수 있는 언어로.

이 때 두 사람이 시크릴어로 대화하는 장면은 번역이 되지 않아

느낌으로 짐작을 할 뿐이지만, 마르틴과 주비아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짐작건대, 충분히 내용을 추론할 수 있다.

간밤, 마르틴과 주비아의 밀회를 에바리스토가 목격하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노인은 마르틴과 주비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크릴어로 다시 대화를 시작한다.

하지만 화해도 잠시,  에바리스토와 이사우로는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이사우로와 단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에바리스토. 하지만 이사우로가 그의 손을

잡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멸의 눈길을

보내고 그날처럼 이사우로를 폭행한다.

기절한 이사우로가 다시 눈을 뜬 장소는

바로 에바리스토의 집. 이사우로는 집 안 곳곳에

걸린 마리아의 사진을 보며 질투심에 불타고

결국 마리아의 사진까지 태워버리고야 만다.

이를 알게 된 에바리스토가 대노하여

기름통을 들고 이사우로의 집에 가는 걸

동네 주민(영화 초반, 이상향으로 떠난 원어민의 딸)이 목격하고 마르틴과 주비아에게

알린 것이다. 마르틴과 주비아 덕분에 

이사우로는 간신히 목숨은 구했지만

 에바리스토의 손에 의해 활활 불태워지는 오두막을 보며 절망하고,

원래부터 앓고 있었던 병세가

 더욱 심해진다.

시크릴어 원어민 어머니를 모셨던 딸은

이사우로에게 이상향으로 떠난 어머니의 방을

내드리고 마르틴도 그를 병원 진료를 받게하며

간호하지만 의사는 가망이 없다 말한다.

마르틴과 주비아는 에바리스토에게

이사우로와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간곡히 말하지만 에바리스토는 거절한다.

이후 이사우로는 오직 시크릴어만을

사용하는 사람들만 갈 수 있다는 이상향으로 향한다.

이미 그곳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부름에 응하던 이사우로는 자신을 뒤따라온 마르틴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 여기서 관객이 알 수 있는 시크릴어는 우피베 뿐이다.

우피베. 친구. 이사우로가 예전에 마르틴의 어깨를 두드리며 했던 말이다. 마르틴은 단번에 느낌으로 우피베의 뜻을 알게 된다.


나중에 마르틴은 에바리스토를 통해

그 말의 뜻을 알게 된다.

"우피베. 자이데, 우피베헤....
친구여. 우리가 말하지 못한 것들은 말하지 못한 채 남겠지만

( 이 다음 말들은 솔직히  기억이 잘 안난다.

내가 가끔이나마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기억할 수 있을 때

나의 감상과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내 생각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나의 언어로. 그런데 이 언어가 소멸해버린다면?

세상에 이 언어를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

이제는  나,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이렇게 단 두 사람뿐인데,

이제 그 한 사람마저 사라진다면?

나의 마음은 어떨까?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한편으로는 제주 방언이나 우리라 각 지역의 토속 언어 연구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잘 있게, 소중한 친구여.

이 말을 마르틴을 통해 듣게 된

에바리스토는 눈물을 흘리고,

에바리스토는 자신의 의자를 짊어지고

이사우로가 있는 동굴로 향한다.

이사우로가 들어간 동굴은

영화 속에서 말하는 이상향.

우리의 언어로  말하면 저승이다.

 영화 초반, 이상향으로 떠나기 전에 

시크릴어를 쓰던

또 한 명의 여자 원어민은 마르틴에게

태초에 여자는 새였고,

자신이 사랑하던, 땅을 걷는 최초의 남자에게

만물의 공용어인 시크릴어를 가르쳤다고 이야기한다. 슾속에서 시크릴어의 신비를

 마르틴이 느끼는순간은  신비롭고 장엄하다.

에바리스토가 항상 소중히 들고 다니는 의자.

난 이사우로가 혹시 만들어준 의자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영화에 의자에 대한 사연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항상 에바리스토는 의자를 항상 짊어지고 다녔다.

어쩌면 그에게 의자는 그를 옭아매는 사슬,

혹은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였던 것이 아닐까. 에바리스토의 의자가 마지막으로 놓인 곳은 이사우로가 들어간 동굴 앞이다.

에바리스토는 이제, 항상 짊어다니고 다니던 의자에서 결연히 일어나 이사우로가 있는

동굴로 천천히 걸어간다. 자신의 진짜 이상향으로. 이사우로가 있는 그곳으로.

이 영화를 보고, 두 노인의 50년에 걸친 치정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스페인어의 지배로 끝내는 사라져야만 했던

멕시코의 토속 언어와 종교, 문화에 대한 우화 또는 마술적 리얼리즘 영화 라는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치정극 등의  요소들을 불호로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멕시코와 스페인, 멕시코와 미국으로 대비되는 새로운 이방 세계에 대한

거부, 동경, 융화 등이

젋은 세대와 노인 세대를 통해

교차적으로 펼쳐지는 지점들이

나에게는 흥미롭게 다가왔고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굳게 편입되었다고

평생 믿었왔던 에바리스토가 영화 말미에는

 자신의 의자를 내려놓고,

 이사우로에게 귀의하는 결말은

 많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추천으로 본 영화였는데, 선댄스 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점이 내 흥미를 끌었다.

<위플래쉬>, <치> 등 선댄스 영화제

수상 작품들을 모두 인상 깊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무척 내게는 강렬하게 다가왔다.

두 시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언어란 무엇인가, 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언어의 본질과 사라져가는 토속 문화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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