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소설집, 2023년 6월, 레제
다시, 새롭게 읽는 김연수의 작품 No.4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2800418
김연수 작가가 전국의 도서관 낭독회에서
낭독한 짧은 소설을 모아 소설집을 펴냈다.
지난해 초여름에 출간된 책이었는데, 그때는 바쁘다는 이유로
대충 몇개의 소설만 훑어만 보다가
여름의 한복판에 접어든 지금에서야 다시 이 책을 펴본다.
언뜻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설레임의 숨결을 다룬 <여름의 마지막 숨결>이나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고하는 <첫 여름> 등
책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여름의 정취들이 좋다.
<여름의 마지막 숨결> 中
P. 31
여러 여름들이 잊히지 않는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984년 여름이다. 그해에 나는 중학생이 됐다.
(중략)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 어릴 때부터 많이 듣던 말이다.
p.32
다 거짓말이다. 우리는 싸우면서 쪼그라든다. 서열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게 되니까.
(중략)
하지만 그런 나 역시 1984년 3월 하순에는 누군가와 뒤엉켜 교실 바닥을 굴러야 했다.
그건 쓰나미 같은 것이다. 좋고 싫고 그런 게 없다. 그저 휩쓸릴 뿐이다. 그렇게 중학생들은 쪼그라든다.
(중략)
“나는 비폭력주의자야.”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던 끝에 그 친구가 말했다.
그 말이 너무 멋있게 들려 집에 돌아가면서 나는 몇 번 중얼거려봤다.
“나는 싸움을 잘 못해” 같은 말에 비해 훨씬 근사했다.
나도 비폭력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p.33
“나는 비폭력주의자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 친구는 외국 노래를 좋아했다. 그것도 멋있었다. 나는 그애의 모든 것이 좋았다.
자연스럽게 팝송을 좋아하게 됐다.
(중략)
1984년은 명반이 쏟아져나온 하였다. 프린스의 <Purple Rain>,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Born in the USA>, 마돈나의 <Like a Virgin> 등이 모두 그해에 나왔다.
(중략)
당시에는 구독제 스트리밍 서비스 같은 건 없었으므로 모두 음반을 사서 들어야 했는데,
집에서 받는 용돈으로는 일주일에 새로 나온 카세트테이프 하나도 살 수 없었다.
(중략)
그 친구의 제안으로 우리는 각자 LP를 산 뒤, 카세트테이프에 복사해 나눠 가졌다.
(중략)
그렇게 나의 마음은 조금씩 무너졌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나는 이십대 초반의 나에게 괜찮다고, 그렇게 바뀌어가고,
마음이 무너져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1984년의 그 여름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설렌다.
p.35
어느 오후, 수업이 끝난 뒤 각자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무척 더웠던 모양이다. 그 친구가 수영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경부선 철교 아래, 수심이 깊은 곳이었다.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 때의 그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1984년 여름, 내 몸을 감싸던, 다리 아래의 검고 차가운 물.
이 년 뒤, 고등학교 입시를 위해 야간자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 친구를 따라 다시 그 철교 밑으로 간 적이 있었다.
(중략)
단지 덩치가 크고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그 친구는 일년이 넘도록
몇몇 애들에게 집단괴롭힘을 당했다.
p.36
그러다가 어느 날 그애들 중 가장 힘센 아이와 하루 종일 싸웠다.
우리는 둘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쉬는 시간마다 이어진 싸움은 점심 시간에도 결판이 나지 않아 수업이 끝난 뒤까지 계속 됐다.
당연히 나는 그 친구가 이기기를 바랐다.
놀랍게도 내 바람은 이뤄졌고, 우리를 괴롭히던 아이들은 더 이상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싸움 뒤로 친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내게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다른 학교의 싸움꾼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고, 여자애를 사귀었다.
그 모습에 나는 실망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처럼 슬펐다.
<첫 여름> 中
P. 47
낯선 여름이었다. 모두가 마스크를 쓴 채 여름을 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날씨마저 이상해 기상관측 이래 가장 긴 장마가 찾아왔다.
비는 내렸다 하면 억수같이 쏟아졌다.
그보다 더 큰 재앙이 올 거라는 예언이 인터넷을 떠돌았고,
거기에 호응하듯 전염병은 더욱 번져갔다.
확진자가 급속히 늘어나자 수도권의 식당과 주점은 저녁 아홉시까지로 영업시간이 제한됐다.
팬데믹 이후 첫 번째 여름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그 여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생각날 때마다 그 사진을 꺼내 들여다봤다.
사진 속에서 엄마는 한 소녀와 함께 서 있다. (중략) 두 사람 뒤에는 촉석루가 서 있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시절의 엄마지만, 어리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엄마와 나의 삶은 같은 시간으로 묶여 있으므로 그 사진을 볼 때 마다
나의 한 부분은 아주 오래전, 내가 태어나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역시, 내가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가 담긴 문장들.
나 역시 아주 오래전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어보았지만,
소설가는 마르고 젖은 존재이며, 글쓰기는 인식이고, 인식은 창조의 본질이라는
이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여전히, 다시 읽는 김연수 작가의 소설은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내게,
이제 생각한다는 것, 그 자체가
귀찮아서 소설의 긴 문장 같은 건 읽기도 싫다고 생각하는 내게
쓰러져 울고 있는 땅 아래 자신이 모르는 가능성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오직 이유없는 다정함으로 말이다.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 中
P.113-114
# 녹취 04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을
제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거, 기억납니까?
그 세계는 우리가 디디고 선 이땅의 아래에 있습니다. 지상의 사람들은 몰라도 되는 세계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세계는 아닙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광부들의 세계는 존재합니다.
조지 오웰에게 소설가란 이 두 세계 사이를 넘나드는 존재입니다.
비유하자면 소설가는 마르고 젖은 존재인 셈이죠. 소설가는 몰라도 되는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그 세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글쓰기는 인식이며, 인식은 창조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 말한 것도 다정함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중략)
비록 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지만,
제 뒤에 오는 사람들은 지금 쓰러져 울고 있는 땅 아래에
자신이 모르는 가능성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세계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으로 말입니다.
제가 소설을 쓰고 출판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