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속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그들의 이야기.
추억의 콘텐츠 리뷰 No.5
“빨리 가고 싶은 세상이야.”
뇌종양에 걸린 드라마 속 남주가 치료를 거부하고 소주병 깡나발을 불며 약혼녀에게 하는 말이다. 약혼녀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주를 차지하기 위해 그가 생계를 잇는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게 하고,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서 대기업의 취업 면접에서 탈락하도록 손을 쓰고, 사채업자를 이용해 그와 그의 식구가 사는 집에 차압을 넣는다.
약혼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사실 남주 탓이긴 하다. 극 초반에 가난이 너무 싫다는 이유로 부잣집 딸을 만나 팔자 한번 고쳐보겠다며 남주가 그녀를 먼저 꼬셨기 때문이다. 출세를 위해 부잣집 여자 한번 만나보겠다고 불철주야 노력하던 남자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바꾸고, 평범하게 살아보려고 애쓴다. 자신에게 이별을 고하는 남주에게 너는 사랑만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부잣집 딸이 차갑게 비웃지만, 남주는 네가 아는 내가 전부는 아니라고, 쏘아붙인다. 그러자 그 선택으로 인한 생활의 무게를 곧 알게 해주겠다는 그녀의 협박성 멘트가 들려온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뒤로 한 채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지만 그 여자네 집에서는 시간 강사였던 여자가 가르쳤던 연하의 학생인데다가, 고아인 남주가 탐탁지 않다. 남주가 여자보다 어린 것도 싫고, 고아인 것도 싫고, 가난한 것도 싫다는 여자의 어머니에게 그는 나이가 어린 것도, 고아인 것도 자신이 선택한 것은 아니라고 대꾸한다. 그러자 여자의 어머니는 말한다.
“삐뚤어질대로 삐뚤어져서 오기만 남은 니 이모, 너 내가 젤 싫어하는 인간들이야.”
여자의 아버지는 “사람이란 게 너무 가진 게 없다 보면 마음 어느 한구석에 꼬인 데가 있기 마련이야. 마음이 건강하질 않아. 난 너같이 모멸감도 모르는 뻔뻔스런 놈이 싫다”고 말한다.
그런 말까지 들어가며 결혼하려고 했던 여자에게 남주는 직장을 잃고 집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자 이별을 고한다.
“빈 껍데기만 남은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남주를 원망하는 대신 여자는 이해한다. “나는 걔가 이해가 돼. 사는 게 힘들어서 사랑까지 귀찮아졌을 거야.”
여자는 남주에게서 “사는 게 재미없다”는 말을 듣고서 극 초반에 버릇없고 이기적이며 오만했다고 생각했던 남주를 이해하게 된다. 여자는 부잣집 아들 행세를 하고 다니는 남주에게 비싼 차 몰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위화감 조성하지 말라고 충고했다가, IMF 때문에 노가다 일당이 얼마나 깎였는지 알기나 하냐고 핀잔을 듣는다.
여자는 그 이후 남주가 밤엔 새벽 시장에서 일하고 낮에는 대학교에 다니는 가난한 고학생임을 알게 되고 그동안 그가 했던 행동들이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위악임을 알게 되고, 그를 이해하게 되면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 사랑은 결코 쉽지 않다. 선생과 제자(학교에서는 여자가 학생과 연애해서 교수의 품위를 손상했다는 이유로 교수 회의까지 불려 가고, 학생들은 두 사람을 놓고 뒤에서 쑥덕거린다), 해외 유학까지 다녀온 중산층 집안의 외동딸과 가난한 고아 출신의 청년 가장이라는 계급과 출신 성분으로 인한 갈등만으로도 버거운데, 심지어 부잣집 딸과 남주가 사랑하는 여자는 친 자매처럼 지내던 사이였고, 여자에게는 그녀를 대학교 시절부터 짝사랑하던 자상한 선배가 있다.
여자의 집안에서는 교수라는 번듯한 직업을 가진 그 선배와 여자를 결혼시키려고 하지만, 혼수품을 마련하기 위해 들린 가전 매장에서 여자는 선배와 결혼할 수 없다며 울면서 자신의 진심을 토로한다.
이렇게 여자와 남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부모의 거센 반대를 이겨내고 겨우겨우 결혼 허락을 받아내지만 남주의 하나뿐인 친구는 온갖 사고를 치며 끝끝내 그를 구석으로 몰아간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왜 도와주지 않느냐며 친 오빠의 뺨을 후려치는 여동생과 그 여동생이 사랑하는 남주의 유일한 친구 때문에 그는 힘겹게 얻은 사랑을 포기하고야 만다.
남주가 집에 닥친 위기를 수습하려는 과정에서, 그가 초반에 꼬시려 했던 부잣집 딸이 그를 경제적으로 도와주겠다고 제안을 해온다. 당장 식구들이 거리에 내몰릴 위기에 처하자 남주는 일단 부잣집 딸이 내민 손을 잡은 후 그녀와 약혼을 한다.
하지만 남주는 약혼녀가 그를 차지하기 위해서 사채업자와 손을 잡고 집문서를 담보로 확보한 후 차압을 넣었던 일, 다른 회사의 인사 담당자를 포섭해서 면접에서 그를 탈락시켰던 일 등 그의 뒤에서 했던 공작은 모른다.
나중에 이모를 통해 약혼녀가 집에 차압을 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는 약혼녀를 원망하지 않는다. 남주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를 스스로 포기하고 나서 삶에 아무 의욕도 없다. 그 이전에도 사는 게 재미없다고 했던 남자였지만, 한 여자를 만나고,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여자를 통해 겨우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는데, 그 여자가 없는 인생 따위, 그에겐 의미가 없다.
“그 여자를 사랑하는 건, 내 인생을 사랑하는 거야.”
이 대사가 발병 전인지, 후인지 전후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을 비웃던 남주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이모에게 했던 말이다.
뒷공작 등으로 겨우 남주의 옆자리를 차지했던 약혼녀는 남주의 발병 사실을 듣고 그에게 치료를 권하지만 요지부동이다. 그제서야 약혼녀는 깨닫는다. 자신의 옆에서는 죽고 싶어 하는 남자가 그 여자 옆에서는 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약혼녀도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어렸을 때는 약혼녀의 집착도, 그렇게 온갖 방법으로 집착해서 겨우 얻은 남자를 포기하는 것도 모두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포기할 줄 아는 사랑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차지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겠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도 이제는 이해가 간다.
정말 정말 좋아했던 드라마였는데, 대사도 완벽하진 않지만 거의 기억하고 있을 정도인데, 이상하게도 이 드라마는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보면 감정 소모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였다.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져 오기만 남은 너 같은 인간이 제일 싫어. 모멸감도 모르는 근본 없는 뻔뻔한 놈.”
라는 말을 사랑하는 여자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듣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서는 그 집에서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사촌 이모가 “너 같이 가난한 애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언감생심 누굴 바라냐고. 너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생겼다” 고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가난은 결혼의 걸림돌이구나, 어릴 때 이 드라마를 보며 알았다. 물론 다른 드라마에서도 가난은 결혼의 걸림돌이었겠지만, 이 드라마의 대사는 너무 현실적이다. 사촌 이모는 “침대에서만 생활하던 애가 네 좁은 방바닥에서 어떻게 잘 거야?”라며 그를 쫓아다니면서 그녀를 포기하라고 퍼붓는다.
그래도 이 작품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여서, 더 부잣집인 약혼녀 집안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데릴 사위로 들일 수 있으니 더 좋다고 환영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약혼녀는 남주의 상사다. 약혼녀는 자신이 시키는 대로 일하지 않는 남주에게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명령한다. 이 말에 남주는 나는 네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냐고 언성을 높이다가 약혼녀가 자신의 말대로 하라고 하자, 네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또 비뚤어진다. 물론 이것도 다 발병 전의 이야기다. 죽음 앞에서 남녀 권력의 위계 질서 따위 무슨 대수겠는가.
남주가 발병한 이후 약혼녀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한다. 남주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그녀라면, 그를 살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여자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집을 나가려고 한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여자를 거부하지만, 여자는 막무가내다. 살 수 있는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장 당신을 붙잡고 싶지만 내일 당장 내가 눈을 뜨지 않으면 어쩔 거냐는 남주의 말에 여자는 말한다. “그때는 네가 나를 위해 조금이라도 살려고 노력했던 그 기억으로 살면 돼.” 결국 남자는 한사코 밀어내던 여자의 품에 안겨 울면서 진심을 토한다.
“살고 싶다.”라고.
그렇게 3개월 시한부를 선고받은 남자는 몇 개월을 더 산다. 여자와 결혼도 한다. 남자가 발병하기 전에는 가난한 고아라서 모멸감도 모르는 근본 없는 놈이라고 욕하던 여자의 부모는, 그가 곧 죽을지도 모르는 시한부 인생인데도 처음에만 조금 반대했을 뿐, 딸이 그와 함께 있겠다며 집을 나가려고 하자 못 이기는 척 그와의 결혼을 허락한다. 결혼 이후에는 사위도 자식이라며 극진하게 챙겨준다.
(이 부분은 그때도 지금도 솔직히 이해가 안 된다. 물론 현실에도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 가족이 만약 이런 선택을 한다면, 나는 끝끝내 반대할 것 같다. 결혼을 안 해도, 그의 곁에 있어 줄 수 있는데 왜 여자는 굳이 결혼을 하려고 했을까. 그의 말대로 당장 내일 눈을 안 뜰 수도 있는 상황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남자도, 남자의 가족도 여자에게 굳이 결혼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그녀를 말리려고 한다. 하지만 여자는 한사코 그와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꺾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가슴 깊이 지닌 그에게 가족을 만들어주고 싶어서였을까. 드라마 속 인물이지만 가끔은 궁금했다. 그가 떠난 후 그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내가 본 드라마 중에서 유일하게 후일담이 궁금해지는 인물이다.)
남주는 여자 옆에서 투병 생활을 하면서 사고뭉치 친구와 결혼한 여동생 부부의 아기도 품에 안아본다. (이때는 남주의 눈과 귀도 멀었고, 걸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여동생 부부의 아기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기까지 품에 안아보자 남주는 감격한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남주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결국 병원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말을 듣는다. 여자는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말을 들은 날, 담담하게 남주의 옆에 누워 속삭인다.
“처음 만났을 때 정말 버릇없는 애인 줄 알았어.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진짜 버릇없더라.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내가 싫었어?”
“하나님이 날 정말 사랑하나 봐요. 나한테 참 많은 걸 가르쳐줘요. 전엔 눈으로 당신 보는 게, 귀로 당신 말 듣는 게 그렇게 귀한 건 줄 몰랐어요...자고 싶어요. 자면 꿈꾸고, 꿈속에선 당신 볼 수도 있고, 당신 목소리도 듣고 그러거든. ”
“그래, 자. 낼 아침에 보자.”
“아침에 봐요.”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열시가 넘어서도 남주는 눈을 뜨지 않았다. 여자는 담담하게 말한다. 그가 다시 눈을 뜨는 세상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어렸을 때는 비디오 테이프로 자주 돌려 보던 드라마였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아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대사를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드라마 속 분위기는 거의 다 기억하는데도 이상하게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가끔 이 드라마가 생각났지만, 그때마다 분위기가 밝은 다른 드라마를 찾았다. 나는 정말 가난이 싫다고, 지긋지긋하다고,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 동네를 떠나 아주 담이 높은 동네에 살고 싶다고 말하던 장면도 생각나고, 직장을 잃고 한강에서 깡소주 나발을 부는 남주의 노숙자 모드도 가끔 생각났지만, 발병 사실을 알고 빨리 가고 싶은 세상이야. 라고 말하는 남주의 대사도 가끔 생각났지만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어릴 때는 그 대사의 진짜 무게를 몰랐기 때문이었을까. 그때 왜 이 드라마가 이렇게 좋았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막연히 나중에 어른이 되면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러던 차에 이 드라마의 대사에 꽂히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비디오로 녹화해서 또 보고 또 보고. 그랬던 드라마였는데, 왜 성인이 된 이후로는 다시 볼 엄두가 안 났을까. 그냥 이 드라마는 기억 속에 묻어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같은 작가가 쓴 작품이었다. 드라마를 보다가 바로 느낌이 왔다. 드라마 속 남주인 PD가 구상하는 그 드라마가, 바로 그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그들이 사는 세상>의 시청률이 어떠했는지는 방영 당시 안 봐서 잘 모르겠지만, 드라마 속의 드라마로 만들어진 그 남자의 이야기는 꽤 성공을 거둔 것 같다.
하지만 매니아 드라마, 라는 평가를 받고 방영 당시 여러 동호회가 만들어져 저조한 시청률에도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되었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을 뿐, 내가 집착했던 그 드라마는 당시에 경쟁작에 모두 밀렸다. 당시 우리 집에는 PC가 없었고, 숙제 등을 하기 위해서는 PC방에 가야만 했던 시절이기에 나는 그 드라마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인터넷에서는 화제가 되었을지언정 그 드라마는 초반에만 타사와의 경쟁에서 잠깐 승기를 잡았을 뿐, 시청률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6개월간 3개의 드라마와 경쟁했는데, 경쟁작에 시청률이 모두 밀렸다. 내가 이걸 기억하는 이유는 초반부를 제외하면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당시에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을 갔을 때 한 방 쓰는 아이들 중에서 이 드라마를 보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에서도 이 드라마를 본방 사수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지난한 싸움을 해야 했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길고도 힘든 싸움이었다.
당시 아버지가 보던 일간 신문에서는 주간 드라마 시청률이 TOP 10까지 나오는데 극 초반을 제외하고서는 TOP 10에 아예 들지도 못했다. 경쟁작들은 모두 거의 TOP 10, 그중에서도 최상위권이었다. 그 이전 작품까지는 주간 시청률 TOP 10 목록의 최상위권에서 남주의 전작 드라마 제목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항상 시청률이 높은 작품에만 출연하는 배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드라마는 당시 기준으로 중후반 시청률로는 망한 편에 속했다. (내가 드라마 종영 당시 수집했던 기사를 보면 평균 시청률 16%에 그쳤다고 나온다.)
나는 이 드라마가 조기종영될까봐 항상 조마조마했고, 결국 6부작이 줄어든 채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당연히 동생이 기억 못할 줄 알았다.
동생은 역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한 남주의 다른 작품은 거의 기억 못 하면서도 이 드라마의 길기도 긴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극중에서 오빠의 뺨을 후려친 여동생의 이야기도 기억하고 있었다. 동생은 당시 이 드라마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 드라마의 제목과 거기에 나오는 배우들의 이름, 심지어 드라마 장면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떤 드라마는 시청률과 상관없이, 한번 보면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힘을 지니기도 하는 모양이다.
(나 역시 그 장면이 어찌나 충격이었는지, 비록 일곱 살 정도 차이가 날 뿐이지만, 자신들을 버린 엄마 대신해서 부모 역할을 하며 키웠다는 오빠의 뺨을 여동생이 후려치는 그 장면이 아직까지 잊혀지질 않는다. 자식처럼 키웠다는 여동생에게 뺨을 맞고 남주도 반쯤 넋이 나갔다.)
아, 정말 그때 내가 이 드라마에 집착하긴 했었구나. 동생이 드라마의 장면을 기억할 정도라면. 그래서 다시 보기로 했다. 그때와 다른 감정이 드는지. 다시 보니까 그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혹은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 속에서 잊힌 장면들이 보였다.
중년 부부의 권태로움과 위기, 한없이 집착하다가도 한순간에 사랑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 남편을 잃고 딸과 둘만 사는 할머니의 명언들. IMF 이후 변한 사회상까지. 물론 그때도 그런 부분들이 재미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탓인지 그런 부분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보니까 그런 부분들이 보이고 공감이 갔다. 그리고 극중 남주의 대사가 뼈저리게 다가왔다.
“사는 게 재미없어. 빨리 가고 싶은 세상이야. 초라할 대로 초라해져서 빈 껍데기만 남은 이 모습 보여주기 싫어. 살고 싶어.”
볼거리가 화려한 드라마는 많다. 캐릭터가 판타지스러운 드라마도 많다. 가끔은 그런 드라마를 재탕한다. 내 어릴 적 꿈을 실현해 주는 인물들이 나오는 드라마도 가끔은 재탕한다. 그 드라마 중 일부는 이 매거진에서 리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의 대사가 내 폐부를 찌르진 않는다. 보는 순간은 재미있지만, 그냥 낄낄대며 혹은 아, 나도 저 드라마를 보며 한때 저런 꿈을 꾸었지, 라고 잠깐의 여흥거리로 족할 뿐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대사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가슴 한 구석을 찌른다. 이 드라마의 작가는 여전히 현역이고, 그 뒤로도 정말 많은 명작을 만들어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귀차니즘이 심한 나로서는 이 드라마 이후 <꽃보다 아름다워> 밖에 본 게 없다. 중간중간 몇몇 회차를 본 드라마들은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본 드라마는 그 이후 <꽃보다 아름다워>뿐이었다.
그러다가 최근 OTT에서 우연히 <그들이 사는 세상>의 포스터를 보고 흥미를 느껴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의 작가와 여주는 또 다시 협업을 한다고 들었다. <그들이 사는 세상> 이후 다른 작품에서도 함께 한 것 같은데 또 다시 만난다는 기사에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그들이 처음 협업했다는 그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연히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만났다. 그 이전에도 가끔씩 생각났던 그들의 이야기. 성인이 된 이후에는 가끔식 생각났지만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 이제는 사는 게 재미없다, 라는 말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그들의 이야기. 다시 보면 그때, 이 드라마를 좋아했던 그 감정이 되살아날까. 혹은 그 대사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불안감을 누르고 긴 회차의 드라마를 다 보고 난 지금은, 조금 후회스럽기도 하다. 역시나, 이 말의 무게는 감당하기 힘들다.
다행히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보았다. 그들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지만 이 드라마에도 이와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그런데 뭔가 작가가 달라진 것 같다. 내가 비평가가 아니라서 정확하게 뭐가 달라졌는지 여기에 쓰기는 힘들지만, 작가도 그때에 비해 연륜이 쌓이면서 인물들과 타협을 하게 된 걸까. 그때에 비하면 남주를 보는 게 아주 힘들진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들이 사는 세상>조차 거의 이십년전 드라마구나. 이제는.)
그 드라마의 남주는 그 당시에도 느꼈지만 극중에서 정말 뺨을 많이 맞는다. 사랑하는 여자한테도 맞고, 약혼녀한테도 맞고,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에게도 맞고, 여동생에게도 맞고, 이모에게도 맞는다. 모두가 그를 이기적이며 냉정한 놈이라고 비난하면서도 막상 일이 터지면 그에게 사태를 수습하라고 요구한다. 남주는 사고뭉치 친구 때문에 깡패 같은 놈들에게 맞으면 일어서고, 맞으면 또 일어서면서 악착같이 일궈낸, 부모 대신 밥을 먹여준 신길동 상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또 사고를 친다.
저러니까 남주가 스트레스로 병에 걸리지, 라는 고구마 상황이 연속해서 터진다. 하지만, 남자가 발병하고 나서는 그전에 있었던 모든 아귀다툼들이 부질없게 느껴질만큼 드라마는 평온한 분위기가 된다. 비로소 주인공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극 초반 삶에 대한 냉소와 출세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했던 남자는, 드라마 중반부의 거센 폭풍을 온몸으로 두들겨 맞은 후 죽음에 임박해서야 비로소 삶을 긍정하게 되고 편안한 표정이 된다.
혹자는 이 드라마가 주인공을 학대하는 드라마라고 했다. (아마 어느 중국 네티즌의 표현인 것 같다. 이 드라마 종영 후 몇 년이 흐르고 우리 집에 PC가 생겼고, 이 드라마에 집착했던 나는 뒤늦게 이 드라마의 국내 리뷰를 찾아보다가 심지어 해외 리뷰까지 찾아보고, 그것으로도 성이 안 차서 숙제를 제쳐두고 이 드라마에 대해 직접 리뷰를 쓰기도 했다. 종영 후에도 몇 년은 인터넷에서 이 드라마의 열기가 식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옛날에도 해외 리뷰를 찾아볼 수 있었다. 당연히 번역 기능도 있었고, 그 기능을 통해 해외 네티즌들과 소통할 수도 있었다. 남주의 전작이 중국 CCTV를 통해 인기리에 방영되었기에 이 드라마도 <내세에서 기다릴게>라는 제목으로 중국에서 방영된 바 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말을 간혹, 지금 들으면, 머릿속에 물음표가 생긴다. 물론 지금처럼 개인 SNS가 발달한 시대가 아닐지는 몰라도.)
또 다른 누군가는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드라마라고, 했다. 이 말에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다시 보기까지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렇게 집착했던 드라마였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그 시절 작성했던 리뷰 문서파일의 날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고대 유물 발굴이구나. 심지어 어느 월요일 새벽 네시였다. 그 문서는 <정치 수행평가>라는 폴더에 남아있었다. 월요일 아침에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정치 수행평가를 새벽에 작성하다가 딴짓을 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 리뷰를 올렸던 사이트는 당연하게도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여기서는 세월의 흐름이 느껴진다. 지금 그 리뷰 전문을 보고 있자면 손발이 오그라들어 끝까지 다 읽기가 힘들다.
아마 이 리뷰도 몇 년 뒤에 읽으면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오래된 문서들을 삭제하거나 포맷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생각은 시시각각 변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사는 게 재미없어? 라는 그 대사가 주는 울림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그 당시 내가 왜 그 드라마를 좋아했는지 그 문서에 어느 정도 답이 나와 있었다.
“TV작품이란 단지 쇼윈도에 포장되어 있는 삶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 작품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드라마란 것은 논픽션이 아니기에 허구가 반드시 가미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훌륭한 픽션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입니다. 대사 하나 하나에 삶을 닮을 수 있는 작가……”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몇몇 대사들은 ‘가난’에 대해 ‘혐오감’을 나타내는 대사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실제로 드라마 방영 당시 ‘나는 이 동네가 싫다는’ 남주의 대사 때문에 해당 지역 주민이 거세게 항의했다는 기사도 뒤늦게 접했다.
그런 부분들은 분명히 작가로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 대사들이 혐오를 나타나는 것이 아닌 인물들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대사라고 생각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뭇 사람들의 시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어디 한군데 꼬여 있기 마련이다, 라는 대사에서 우리 모두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가난한 고아라서 너는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져 오기만 남았다고 남주에게 내뱉는 여자의 엄마 또한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어릴 때는 이런 대사들이 갖는 함의를 솔직히 몰랐지만 엄청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지금도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본방으로 봤을 때 저 대사들이 너무 현실적인 것 같아서 충격을 받았다. 다시 본 지금 역시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본방 당시와는 다른 생각. 나는 당시 서른도 안 되어서 삶을 마감하는 남주가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불쌍한 건 사실, 홀로 남게 되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두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여자는 결혼 후 그가 얼마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잠시 남자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런 여자를 지켜보던 남자는 그녀가 잠들자 머리 맡에서 “당신을 두고 내가 어떻게 떠날까.”라고 읊조린다.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직감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심 자신의 옆에서 그가 완쾌될 것이라고 믿었기에, 여자는 남주의 주치의에게 따져 묻는다. 왜 그가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했냐고.
자신에게 갑자기 냉정해진 여자를 다독이면서 남자는 말한다. “우리, 사랑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해요.”
그 말에 여자의 마음이 풀어진다. 1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결혼 생활 내내 최선을 다해 사랑을 했다. 남자가 시한부 선고를 받자 그의 이모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것은 여자를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혹시나 남자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여자가 걸려 못 떠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만큼은 자신의 사랑에 대해 욕심을 내보려고 한다는 남주의 말에 이모는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다.
드라마라서, 가능한 사랑이라기에는 현실에도 분명히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라면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그들과 같은 선택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사랑에는 경의를 표한다. 여자의 아버지는 결혼 전 여자에게 묻는다. 그가 먼저 떠나도 씩씩하게 잘 살 자신이 있냐고. 여자는 그렇다고 말한다. 남자가 3개월 시한부를 선고 받고도, 몇 개월을 더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와의 충만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사랑의 순간은 여자가 시간이 흘러 흘러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든, 그렇지 않든, 그녀의 삶 한 면을 지탱해 주는 소중한 기억이 될 것이다.
어쨌건 나는 앞으로 또 수많은 드라마를 또 보게 되겠지만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던 <사는 게 재미없어?>라는 그 대사의 임팩트를 넘어서는 말은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빈 껍데기만 남아 초라해질대로 초라해진 모습으로, 사는 게 재미없다고 느낄 때마다, 이 드라마가 생각나니 말이다. 감히 빨리 가고 싶은 세상이야, 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이 드라마를 보던 기억으로 나 역시 충만히 채우는 순간들이 있으니.
ps.1 언젠가 일본 웹사이트에서
일본의 유명 작사가 중 한 사람이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자신이 가사를 썼던
1984년에 개봉했던 영화 <W의 비극>의 주제가를
마치 그대로 영상화 한 것 같았다는,
짧은 인터뷰 축약본을 본 적이 있다.
일본 네티즌들은 어쩐지 그 노래의 가사를 보고
죽음의 그림자를 떠올렸는데,
이 인터뷰를 보고 나니 이유를 알겠다는 코멘트를 하기도 했다.
특히 '시간의 강을 건너는 배로'
'이제 한순간에 불타올라'
'그 뒤엔 재가 되어도 괜찮아'
'가지 말아줘 곁에 있어줘'
'적어도 아침 햇살이 비출 때까지'
이런 부분들이 그런 느낌을 준다고 했다.
나는 그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영화의 주제가 가사 전문을 보니
먼저 그런 글을 읽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드라마 마지막 장면 느낌이 언뜻 오버랩되기도 한다.
ps.2
중국에서 의역한 드라마의 제목은
저승, 사후세계이란 뜻이 담긴
'내세'라는 단어가 들어가고
일본에서는 죽음의 그림자를 풍기는 영화 주제가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 보아,
비록 언어가 다를지라도
이 드라마를 보는 이들은
'죽음'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어느 중국 네티즌은 이 드라마의 남주가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의 주인공인 줄리앙을 연상시킨다고 평했는데
출세 지향적이던 남자가 죽음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아주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이미 겪어보았기 때문에
'죽음'의 그림자가 무엇인지,
아주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사는 게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마다
이 드라마가 유독 생각나는 이유가.
어릴 때는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어보지 못했고,
막연히 그동안 봤던 드라마랑 다른 결인 것 같아서 좋다, 라는
추상적인 감상으로 접근했다면
이제는 이 드라마의 대사, 그리고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OST의 가사가 하나 하나 가슴에 박힌다.
세상 밖에 서있는
또 다른 나를 본 것 같아
널 향한 내 마음 감추어야만 해
그것만으로 모두가 편해진다면
단 한번도 쉽게 내 자신을
포기할 수 없어 많이 힘겨워했지
If you just look into my eyes
Then you will see there are no lies
But now that you're gone
You're my only one
Forever as far as I can see
Forever belongs to you and me
이 드라마에는 많은 명대사들이 있지만,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 김치에다 고추장에다
비벼서 밥 먹어야지. 맛있겠다.
사실, 나는 이런 일상적인 대사들이 더 좋다.
오랜만에 다시 본 이 드라마의 최종 감상은
삶과 죽음에 대한 역설을 깨닫게 해주는 드라마라서
어릴 때 봤을 때 보다 더 좋았던 것 같다.
또한 비록 언어는 다를지라도,
해외 네티즌들이 이 드라마를 보고 분석 평론집을 펴내기도 하고
드라마의 장면을 사용해서 한국어 교재를 발간하기도 하는 등
한번 보고 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아지는 드라마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
그런 점도 새삼 깨닫게 된 점 중 하나다.
방영 당시에는 집에 통신이나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서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지만
시사 주간지에 남주가 여주한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을
익살스럽게 장한몽(일명 이수일과 심순애가 등장한다는 그 작품)에
빗댄 기사를 실었다가 PC통신과 인터넷에 난리가 나서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한테 온갖 항의 글이 쏟아지고
결국 기자가 일일이 답신까지 쓰고
TV방송에 인터뷰까지 하게 되는
일종의 필화 사건으로까지 번지는 사태를 옆에서 지켜본
다른 기자가 마치 벌집을 건드린 것 같았다는 표현을
한 기사도 나중에 읽었다.
그 당시 PC통신과 인터넷에 벌어졌던 '신파극'에 대한
갑론을박의 담론을 실시간으로 보지 못했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그 사태를 지켜본 다른 기자는 이 드라마에도
무조건적인 찬양이 아닌
채찍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결론을 맺었다.
그리고 일종의 필화사건으로까지
번지게 한 토론의 장을 제공했던 그 주간지는 그 이후
후속기사를 실었는데, 그 기사에 보면
당시 시청자들은 20-30대가 주를 이뤘다는 내용이 있다.
앞선 기사에서 드라마에 대한 열광을
'진부한 신세대'들이 열광하는 정도로 평가하는 것을 두고,
그 20-30대들이 반박해온 의견들을 볼 때
'진부한'이란 표현은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IMF 이후의 암울한 시대상황과 자신의 삶을
드라마의 등장인물에 견주어
감상하는 등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당 기사는 논평했다.
그분들은 지금도 이 드라마를 기억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이제 그분들도 신세대가 아닌 중년 혹은 장년이 나이가 되었겠지.
방영 당시 이미 10000여건이 넘어
인터넷 사상 가장 많은 게시판 참여를 나타냈다는 기록의 대목은
아마도 이제 다른 드라마에 그 기록을 넘겨주었을 테고.
하지만, 30년 가까이 해묵은 기사에서도
당시 게시판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뒤늦게 읽었음에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사였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의 기준은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할 말이 많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어느 나라든 일단 방영이 되기만 했다면,
장문의 글을 쓰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