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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C] 6편/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욕망의 연대기

by 이야기술사

Madam Mystery Cabinet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제임스 M, 케인 · 이만식 옮김


그들은 정오 무렵에

나를 건초 트럭 밖으로

내던졌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경제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전 세계가 전쟁과 식민 착취로 허덕일 때 누린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결과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기록되는 불황이 미국과 세계 시장을 덮친다. 이 작품은 그 와중인 1934년에 발표되었다.

목적도 희망도 아무런 꿈도 없는 떠돌이 프랭크는 길 위에서 거짓말과 도둑질, 폭력과 사기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주인공이다. 현실에서 그와 같은 가족, 아니 친구라도 있다면 전생에 나라 서너 개는 팔아먹었다는 평판을 받았을 것이다. 프랭크는 어느 날 역시, 캘리포니아 길 위에서 돈 한 푼 없이 간이식당엘 들어간다. 식당은 ‘쌍둥이 떡갈나무 선술집’ 전혀 인상적이지 않은 이름이다. 이 작품의 무대가 되는 이곳은 여자 주인공 코라와 그녀의 그리스인 남편이 운영하는 곳이다.

코라와 프랭크의 사랑은 이제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보는 순간에 사랑에 빠진다. 아니다. 이들의 사랑이 필연이 아니라 코라 남편의 죽음이야말로 그렇게 보인다. 작품 속의 프랭크나 코라처럼 우리는 살면서 아주 작은 순간일지라도 생각한다.

‘저 사람만 없다면.’

혹은 ‘저 것만 없다면.’

그런 가정의 결말은 언제나 해피앤딩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그 한 사람 혹은 그 한 개에 집중된다. 실제로는 수만 가지의 장애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라는 거대한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고전은 뭐니 뭐니 해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다양할 지라도 그 출발이 누군가의 ‘제거’라면 이유야 어떻든 결말은 비극이다. 이 작품의 첫 구절을 책의 첫머리에 올린 미국의 대표적 미스터리 작가 스티븐 킹의 ‘별도 없는 한밤에’ 역시 이와 같은 계보에 있다. 비뚤어진 욕망이 마음속에서 걸어 나와 현실이 되는 순간 악몽은 시작된다. 이 작품은 프랭크와 코라의 욕망이 현실이 된 순간부터 극적인 반전이 거듭되는 결말까지 속도감이 장난이 아니다.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미국의 경제 호황은 ‘세계 대전’이라는 파괴와 핏물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프랭크와 코라는 자신들의 ‘사랑’이 코라의 남편 파파다키스의 죽음 위에서 더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1930년대 미국은 ‘공황’이라는 새로운 경제 용어를 탄생시켰다. 수많은 실업자와 부랑자와 떠돌이를 양산해 내었다. 프랭크와 코라의 ‘사랑’은 어느새 의심과 증오와 분노를 양산한다. 그들이 서로의 진실을 깨달았다고 해도 타인의 죽음 위에 세워진 것은 쉽게 무너진다.

그래도 이 작품의 제목처럼 포스트맨(운명)은 벨을 한 번 더(기회) 눌렀다. 프랭크와 코라는 그러나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P.S: 욕망의 연대기

[맥베스] 2015./

영국, 프랑스, 미국/ 저스틴 커젤 감독

일단, 스티븐 킹의 [별도 없는 한밤에]를 먼저 읽고 이 작품을 읽고 이 영화를 보면 (순서를 바꾸어도 나쁘지 않을 듯.) 무언가 가슴에 한줄기 길이 생기는 기분이 든다. 고개를 끄덕이되 한숨이 난다. 우리는(인간은) 이다지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반복하는구나. 뭐 그렇지. 그럼에도 보통 사람의 일생에는 이런 일이 없으므로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작품의 소재로 쓰이는 거구나. 물론 뛰어난 작가들의 역량 덕분이겠지만 매번 긴장하게 된다. 어두운 욕망을 잠재우는 방법은 이런 작품의 결말이 수없이 반복되어 ‘학습’되어진 결과 일까? 아니면 우리 앞에 그 만한 결심을 하게 만드는 절박한 일이 없어서 일까? 후자는 순전히 ‘운’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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