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심연이 내 발밑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더, 훨씬 더 깊었다. 나는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에는 밑바닥이 없었다.”
그렇다. 그는 뛰어들었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사립 탐정 ‘필립 말로’는 사건 속으로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넣었다. 말로에게 사건을 맡긴 의뢰인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밤보다 더 어두운 암흑 속으로 스스로 들어간 것이다. 몇 번이나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 말로는 그런 남자였다.
말로는 작품의 첫 장면에서 ‘무스 맬로이’라는 거대한 몸을 가진 백인 남자를 만난다. 이제 막 수감 생활을 마치고 거리에 나온 그는 8년 동안이나 소식이 끊긴 애인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흑인 한 명을 죽인다. 말로는 맬로이가 찾고 있는 여자를 찾아 나선다. 사람을 죽인 맬로이는 경찰에 쫓기기 시작한다. 말로의 말대로 ‘호기심 빼고는 그가 상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사건을 하나도 맡지 못했다. 무보수 사건이라도 기분 전환은 될 터였다.”
나는 말로의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 이 작품으로 ‘필립 말로’를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곧 깨닫게 된다. 말로는 맬로이의 간절함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입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속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 하더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나는 이 표현을 벌써 두 번이나 썼다. ‘말로’는 요즘 표현대로라면 ‘츤데레’ 그 자체였다.
제목이 Farewell, My Lovely 다. 사랑과의 작별인 것이다. 그래서 였을까? 책장을 넘기기도 전에 막연한 슬픔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국 무스 맬로이의 사랑은 작별로 끝이 난다. 말로는 그의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뛰어다닌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며 마음이 애잔해졌다. 그것도 무려 추리소설을 읽으며 말이다. 말로의 고농축 1930년대 식 농담도 작품을 읽는 소소한 재미였다. 무엇보다 타인에 대한 진한 애정을 가진 ‘필립 말로’라는 매력적인 인물을 만날 수 있어 즐거웠다.
P.S: 인간과 사회에 대한 눈물 나는 애정
[시그널] TVN 드라마/ 2016/ 한국/ 김원석 연출·김은희 극본
1989년이라는 과거에 등장하는 이재한(조진웅 분)은 이 드라마를 통해 성장한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필립 말로를 보면 바로 이재한 형사가 떠오른다. 여러 사건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현재 시점의 박혜영(이제훈 분) 경위보다 확실히 이재한 형사가 말로와 가깝다.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인간들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눈물 나는 애정을 보여준 이재한과 말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언제나 이런 인물들에게 애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