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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쓰.반] 9편 인생은 아름다운 운명

소설

by 이야기술사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금요일의 리뷰 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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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시간이다, 임레 케레테스의 <운명>


최근 <인생은 아름다워>가 재개봉했다.

4월29일 현재까지 재개봉작 역대 흥행2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2차 세계 대전, 참혹한 유태인 수용소의 현실을

한편의 감동적인 동화로 바꿔놓은 아버지 귀도의 마법 같은 이야기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입가에 내내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흐르는동안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을

재미있는 놀이가 가득한 놀이터로 바꿔말해야만 했던 아버지.


그는 그 이후에 시는 쓸 수 없다고 말했던 철학자보다 위대한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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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아도르노(Th. Adorno)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인간은 시를 쓸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나치에 의한 대규모 유태인 학살이 일어났던 아우슈비츠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20세기의 많은 예술가들은 참혹한 인간성 말살의 현장을 작품을 통해 고발했다. 신시어 오지크의 소설 <숄>, 퓰리처상을 받았던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쥐>, 영화 <쉰들러 리스트>, 그리고 올해 국내에서 극장 재개봉한 <인생은 아름다워> 등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다뤘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의미하는 단어인 ‘홀로코스트’는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조합어가 생겨날 정도로 20세기 예술에서 끊임없이 이용되었던 주제이다. ‘홀로코스트 산업’은 거의 6백만 명에 달하는 유럽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학살당한 사건을 이용해 일명 '윤리적 자본'을 얻은 유대인 엘리트 중심의 단체와 기관, 그리고 그들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여러 가지 산업들을 일컫는 말이다.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삼은 예술 작품이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거나 세계의 권위 있는 예술상을 휩쓰는 현상을 일종의 홀로코스트 산업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책을 통해 ‘홀로코스트 산업’에 대해 처음 문제 제기를 한 노르만 핀켈슈타인은 세계 2차 대전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치의 인종 대청소 소각장으로 악명 높았던 바르샤바 게토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생존자였다. 그의 부모는 죽는 날까지 하루도 과거를 잊은 적은 없지만, 말년에 가서 홀로코스트가 대중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보고 몹시 실망을 했다고 한다. 가스실에서 사라져간 진짜 역사의 증인들을 말이 없는데 살아남은 자들이 오히려 홀로코스트를 떠들며 파렴치한 돈벌이를 하고 있는 현실을 가증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로코스트가 피해자, 역사의 약자 문제이기에 윤리적으로 비난의 잣대를 들이대기 어렵고 또 숱한 영화, 문학 등을 통해 다져진 집단적 기억이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배경 속에서 200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임레 케레테스의 <운명>은 여러 가지로 살펴볼 점이 많은 소설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소설인데, 소년이 고향인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떠나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자이츠를 거쳐 다시 부다페스트로 돌아오는 과정이 로드 무비 형식으로 쓰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 죄르지가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로 가게 된 것은 그 또한 가슴에 노란 별을 달고 있어야 하는 유태인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별이라고도 불렸던 노란 별은 유태인으로 판명된 사람들이 모두 달고 있어야 하는 표식으로써, 만약 유태인인데 노란 별을 달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치에게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했다.


사람들이 ‘너’를 정말로 증오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러니까 ‘너 개인’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려고 애썼다. 다만 ‘유대인’이라는 용어에서 떠오르는 선입견 때문에 증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결국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증오하는지를 알아야 해.”

(중략)

“단지 내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경멸받을 때는 상당히 당혹스러웠어.”

(중략)

“우리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죄르지는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본질적인 이유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죄르지는 노란 별을 달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특별한 거부감이나 불편함 같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노란 별을 단 사람은 저녁 8시 이후 돌아다닐 수 없다는 어머니의 말에 통행 증명서를 발급받았기 때문에 사소한 규정들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고 응수할 뿐이다.


소설의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죄르지의 시각은 객관적이고 차분하다. 열다섯 소년의 시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가스실로 가는 자와 가지 않는 자를 가려내는 그 절박한 위기의 순간도 그저 담담하게 서술할 뿐이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일을 들려주는 데 그친다. 감정이나 이념을 내세우지도 않고 도덕이나 규율의 잣대를 들이대지도 않는다.


“세상은 지금 대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의아해하고 있어”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는 내게 몸을 돌리면서 물었다.

“네가 겪은 일들을 말해 주지 않겠니?”

나는 조금 의아 해면서 남자에게 들려줄 만큼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는 없다고 말했다. 내 말에 남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한테가 아니고 세상에 알리라는 거야.”

나는 그 말에 더 놀라고 궁금했다.

“뭘 알리라는 거예요?”

“수용소의 지옥에 대해서”

나는 지옥에 대해 전혀 모를 뿐 아니라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남자는 단순히 비유였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강제 수용소를 지옥으로 상상하면 안 된다는 말이니?”


소년의 역할은 안내자에 그치고 있다. 소년은 지옥을 상상하는 신문 기자에게 실망스러운 대답만 안겨준다. 생생한 고통 이야기를 원했을 기자는 소년에게 연락처를 남겨주지만 소녀는 이내 그것을 버린다. 그는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이전의 나치를 다룬 작품들은 인간이 처한 극한의 상황을 그려내면서 독자들의 연민을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인간의 극악무도한 잔인성을 폭로하여 분노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에게 수용소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적인 공간일 뿐이다.


수용소를 지옥으로 여기는 신문 기자에게 죄르지는 지옥을 전혀 지루할 수 없는 곳으로 상상할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우슈비츠 같은 수용소도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지루할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


“그래, 네 말대로 그렇다고 치자. 그럼, 그걸 뭘로 설명하겠니?”

나는 잠깐 뜸을 들인 다음 대답했다.

“시간으로요.”

“시간으로라니? 무슨 말이지?”

“시간이 도움이 된다는 뜻이에요.”


죄르지는 부다페스트로 돌아와서 이웃집 사람들과 언쟁을 벌인다. 이웃사람들은 죄르지에게 앞으로 자유롭게 살기 위해 끔찍한 과거를 잊으라고 말하지만, 그는 끔찍한 일들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웃사람들이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묻자 죄르지는 그들은 그 어려웠던 시절에 무엇을 했느냐고 되묻는다. 그들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거야…… 우린 그냥 살았지.”라고 말한다.


죄르지는 그들 역시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왔다고 말한다. 죄르지는 그들에게 자신이 밟아왔던 단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간 죄르지는 10-20분 정도의 시간만 기다리면 곧장 가스실로 가게 될지, 아니면 다시 살아 날 수 있을지 결정이 내려지는 시점에 도달한다. 그런데 기다리는 중간에도 열은 계속해서 앞으로 움직이고 나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체 대열이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큰 걸음을 떼든 작은 걸음을 떼든 조금씩 움직여 나간다. 다만 그러한 일이 단순히 ‘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도 ‘그리로 간 것’이다. 소년은 그 20분의 시간 동안에도 매 순간 다가오는 1분이 어떤 새로운 것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슈타이너 씨는 화를 낸다.


“결국 우리도 책임이 있다고? 우린 희생자야!”


소년에게 운명은 하나하나 ‘시간’의 단계를 밟아가는 일이다. 소년은 대학살의 시간조차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어른들에게 대학살은 폭로되어야 하고, 극복해야하는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그들은 아우슈비츠를 일종의 추상체로 받아들인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모든 유태인 수용소들이 전체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결과물이었듯이 홀로코스트 또한 유태 인들에게는 희생 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내는 개인의 일상적인 감정을 놀라울 만큼 담담하게 포착해내는 <운명>의 시선은 지금까

지 아우슈비츠를 다뤘던 문학 작품들의 시선과 매우 다르다. <운명>은 거리두기 방식을 취한다. 한 걸음 뒤에서 물러나 전체를 조망한다.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운명’이라는 뜻이다.


소년은 나 자신이 ‘운명’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소년이 살아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600만명이 죽어

나갔던 대학살의 현장에서 운 좋게도 살아남았던 어린 소년은 매순간 꿈꾸어 왔던 자유에 대해 말한다. 소년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특권이자, 운명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과연 아우슈비츠는 사라졌는가?


독일은 과거 나치의 악행을 여러 나라들에게 깊이 사죄하고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유태인의 관점에서도 과연 그러할까?


올드위키드송 캐스트.png 연극 <올드위키드송> 공연 당시 캐스팅 보드


지난해 가을 대학로에서 공연되었던 2인 음악극 <올드위키드송>에서 유태인인 스티븐인 뮌헨에서 다하우까지 기차로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하며 다하우 수용소에 있는 안내문은 모두 독일어로 쓰여있었다고 격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일어를 알지도 못하는데!”

다하우에 다녀오기 전까지 스티븐은 자신이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유태인이라는 신분을 한사코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마슈칸 교수가 다하우 수용소에 기껏해야 유태인 시체 더미밖에 더 있나, 라고 하자 자신이 유태인이라고 밝힌다.

세상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유태인 뿐이나며 냉소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마슈칸 교수는 사실, 나치 하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팔에는 나치수용소에서 찍힌 수감번호가 있다. 독일어로 말하고, 노래하던 스티븐은 다하우 수용소에 다녀온 이후에 다시는 독일어로 노래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유태인이 보기에 독일의 자기반성은 선진국의 보여주기식 반성 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하우수용소를 나오는 길에, 아름다운 다하우 마을을 둘러보세요, 라는 내용의 팜플렛을 보며 스티븐은, “아름다운 다하우 마을이라고!” 라고 격분을 토로한다.

독일 등지에서 최근 대두되고 있는 ‘네오나치’ 문제는 아우슈비츠 문제가 과연 과거의 일에만 국한된 것인가? 라는 질문을 갖게 한다.


브런치문서출처.jpg 다하우 수용소


브런치 문서출처.jpg 사진출처 http://www.scrapbookpages.com/DachauScrapbook/overview.html



<아우슈비츠 이후>

-최명란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이후에도 나는 밥을 먹었다

깡마른 육체의 무더기를 떠올리면서도

횟집을 서성이며

생선의 살을 파먹었고

서로를 갉아먹는 쇠와 쇠 사이의

녹 같은 연애를 했다

역사와 정치와 사랑과 관계없이

이 지상엔 사람이 없다

하늘엔 해도 없다 달도 없다

모든 신앙도 장난이다



다하우수용소3.jpg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죽음의 열차에 방치된 시체들/ 사진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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