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뷰파인더

[달. 쓰.반] 3편 주토피아

극장 애니메이션

by 이야기술사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금요일의 리뷰 No.3


(※ 주의: 이 리뷰에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포함한, 강력한 스포가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의 편견은 개체의 고유성을 무시한 채 그저 부정적인 인식을 학습한 결과일 뿐인가? 아니면 수많은 경험에 의해 축적되어진 객관적인 지표인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본성은 진화를 통해 변화가 가능한 것인가? 만약 변화가 가능한 세상이라면, 동물의 본성 그대로를 유지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위험한 행동인가?

디즈니의 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는 보고 나서 많은 질문이 생각나는 영화였다.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분명히 감동적이고 교훈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답답한 마음도 있었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한 감정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리뷰는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보다는, 궁금했던 점 위주로 작성하려고 한다. 먼저 영화의 주인공인 주디 홉스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주디 홉스는 작은 동물은 경찰이 될 수 없다는 주토피아의 편견에 맞서 훌륭한 경찰로 성장하는 ‘토끼’이다. 토끼는 주토피아라는 세계에서 그저 귀엽고, 보호받아야 하고, 홍당무를 팔며 소소한 일상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그런 존재로 여겨지고 있지만, 주디 홉스는 그런 세상의 편견에 맞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한다. 이 대목에서 토끼가 여성 혹은 소수자를 우화적으로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은 바로 눈치 챌 수 있다. 이제 관객들은 어렵게 경찰 시험에 통과했지만 그토록 기대하던 첫 임무로 주차단속임무를 배정받은 주디 홉스가 진정한 경찰로 거듭나는 스토리를 즐기면 된다. 이 과정에 주디 홉스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것은 여우 닉. 닉과 주디의 첫 인상은 좋지 않다. 주디는 닉을 보며 여우는, 대부분의 동물들이 그러하듯이 교활하다고 생각하고, 닉 역시 주디에게 멍청한 토끼의 경찰놀이는 그만두라고 말한다. 그러나 닉과 주디는 포식동물연쇄실종사건을 함께 수사하면서 서로의 편견을 거두고, 진정한 파트너로 거듭난다. 닉과 주디가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맞서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기도 하고, 때로는 한발 뒤로 물러서기도 하며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과정은 매우 좋았다. 닉을 맡은 정재헌 성우와 주디를 맡은 전해리 성우의 케미도 좋았다.

극장에서 더빙판 애니메이션을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어린이 관객들로 꽉 찬 이른 아침의 극장은 매우 산만하고 시끄러울 것이다, 라는 내 안의 편견이 부서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주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이따금 들리긴 했지만, 영화 감상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고, 대부분의 어린관객들은 조용히 영화에 집중했다. 자리를 뜨거나 큰소리로 떠드는 어린 관객들은 적어도 내가 앉아있던 상영관에서는 단 한명도 없었다. 이러한 경험을 다른 영화관의 어린 관객들의 태도까지 적용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관객들로 가득한 영화관에서 성인 관객이 오롯이 영화에 집중하는 것은 힘들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들이 어린이들에게 ‘산만하고 시끄럽다’는 편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수많은 경험으로부터 축적된 인식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모든 어린이 관객들은 극장에서 산만하고 시끄러울 것이다, 라고 생각하던 나의 편견이 그날 아침에 깨진 것만은 확실하다. 편견은 ‘모든 00’은 그럴 것이다, 라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토피아의 세상에서 교활한 여우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닉 역시 여우니까 당연히 교활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라는 것이다.

닉과 주디의 수사로 동물연쇄실종사건의 배후는 ‘작은 동물’을 위한 세상을 만들자고 줄곧 외치던 양 벨 웨더(전직 시장 보좌관이자 후임 시장)이었음이 드러나고, 양은 공통의 적을 만들어 두려움을 심어주고, 그 두려움으로 똘똘 뭉치는 게 뭐가 나쁘냐고 항변한다. 양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의 정치인들이 항상 써먹었고, 지금도 써먹는 방식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당연히 동물연쇄실종사건의 배후는 양이라는 것이 짐작 가능하며 양이 하는 이야기도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잠시 깊은 고민에 빠졌던 것은 동물의 본성에 관한 것이었다. ‘주토피아’라는 세계에서는 분명히 ‘진화’를 통해서 포식자인 호랑이나 사자가 그들의 사냥감인 ‘토끼’, ‘양’ 등의 작은 동물과 화합이 가능하다고 상정하고 있다. 이것을 생태계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자와 소수자, 힘이 강한 사람과 상대적으로 힘이 부족한 사람으로 본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만약 ‘주토피아’의 세계를 소수자의 관점이 아닌 생태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동물연쇄실종사건의 배후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밤의 울음꾼’이라는 독성물질을 포식자들에게 총으로 쏘도록 시킨 양이 아니라, 포식자들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면? 진화를 거부하고, 동물의 본성 그대로, 양육강식으로 유지되는 생태계의 원시 질서로 살자고 주장하는 무리들이었다면? 그들이 현재 주토피아에 형성되어있는, 포식자와 사냥감의 화합의 질서를 거부하고, 옛날의 질서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IS와 같은 테러 집단이 되는 것인가? 생태계에서는 양육강식의 논리가 당연하다고 배웠는데, 국제사회에서 양육강식의 논리로 행해지는 전쟁이나 분쟁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주토피아’에서 말하는 바는 역시 생태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인간 세상일 것이다, 라는 결론을 조심스레 내려본다.


국내 개봉 제목은 ‘주토피아’이지만, 유럽에서의 개봉 제목은 ‘주트로폴리스’라고 하니 좀 더 이해가 갔다. 애초에 이 영화는 생물학적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체가 모여 평화롭게 사는 곳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 하지만 영화의 그런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영화에서 평화의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 말이다. 개체 고유의 생물학적 본성을 억제하고, ‘진화’를 이미 이뤘기 때문에 평화가 가능하다는 전제 하나 만으로 유지 하는 체제가 과연 정말 평화로운 것인지? 시스템 보완책은 없는 것인지? 호랑이가 도넛을 먹고 만족하는 세계는 정말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닌가? 도넛을 먹고도 호랑이가 그 체제에 만족할 수 있다면, 사냥을 하지 않고도 그 고유의 본성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다른 대체제가 있기 때문에 그 체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방식을 보여줬으면 어땠을지? 개체 고유가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본능을 인정하면서도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주토피아는 사바나 센트럴, 사하라 스퀘어, 툰드라타운, 레인포레스트, 버니버로 그리고 리틀 로덴샤라는 6개 구역으로 나뉜다. 각각의 구역은 기후와 습성에 따라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러한 설정을 포식자들에게도 구체적으로 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런데 ‘주토피아’에도 동물 본성 그대로 돌아가자고 하는 집단이 나온다. 그들은 그저 옷을 벗고 있을 뿐이지만. 주디는 옷을 벗고 있는 그들을 보며 부끄럽다고 눈을 가리지만, 그들은 옷을 입고 있는 동물들이 더 이상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힌 것은 아니고 단지 옛날 그대로 옷을 벗고 있을 뿐이니,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요가와 명상, 그리고 환경보호와 자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히피족?

단지 애니메이션 한편 보았을 뿐인데 너무 지나친 생각을 한 것일까?

어디까지나 ‘주토피아’는 최선을 다하면 노력이 보상을 받는다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다. 잠깐 지나가는 조연이지만, 최고의 씬스틸러도 있다. 바로 나무늘보. 차적조회를 할 때의 나무늘보는 정말 숨이 넘어갈 정도 느려터진다.


예고편에서 이 나무늘보를 보고, 저 놈의 나무늘보, 얼마나 느려터진지 꼭 확인하고 만다,는 심정으로 성질 급한 내가 극장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출연 장면은 몇 씬 안 된다. 그래도 영화 마지막에 다시 반갑게 등장한다. 시속185Km로 과속하신 것. 나무늘보가 모든 행동에서 느려터질 것이라는 것도 편견이다. 나무늘보도 때로는 빠르게 행동할 때가 있다는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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