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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대 Mar 09. 2023

개봉 첫 날, 스즈메의 문단속

빛나오르는 은은한 감성, 아쉬운 부분을 다 메울 정도의 색채

 빛나오르는 것


 2018년도, 대학 신입생이었던 나는 우연히 한 영화감독의 전시회에 가게 된다.

온통 모르는 작품들뿐이어서 무료하지만 무난하게 콘티를 감상하고, 일화들을 읽어보며 시간을 녹였다.

그러다 내 눈에 그것이 들어오며, 전시회의 분위기와 가치는 훌쩍 치솟아버렸다.

내가 본 것은 감독의 2013년도 작품인 <언어의 정원>속 벤치였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왔을 것이 분명한, 만들어진 빗소리/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절대 나무일 리 없는 나무벤치/ 벤치를 감싸고 있는 인공적인 식물들.

이 모든 것들이 한 공간에 고즈넉히 자리잡고 있었다.

천장의 조명을 받은 탓인지, 벤치가 놓인 공간은 은은하게 빛나보였고 그 순간, 그 공간의 모든 것은 현실감 있게 나를 관통해버렸다. 진짜 비가 내리는 듯 조금 추워졌고, 벤치는 오래된 나무벤치가 틀림없었으며, 식물들 역시 물을 머금은 듯 빛났다. 몇 초간의 기현상이었다.

나는 그 현상을 '빛나오르는 것'이라고 명명하였다.



도입부부터 피어나는 색채


 영화는 주인공인 스즈메가 폐허 속에서 서성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 시점에서 나는 인물의 행동에 몰입되지 않았다. 나의 눈이 고정된 곳은 바로 하늘이었다. 쨍한 보라색과 담담한 군청색, 그리고 검은색이 적절히 섞인 캔버스에 힘차게 빛나는 별을 뿌려놓은 듯, 신카이마코토의 하늘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잔뜩 머금은 채 몹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포스터 상단에서 볼 수 있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색채의 하늘

 빛나는 하늘과 함께, 이름도 모르는 등장인물들과 처음 보는 상황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고 난 뒤 잠시, 공간이 암전되었고 제목이 스크린 중앙부에 은은하게 드러났다. 후에 나올 사건들을 축약하여 제시함으로서 흥미를 유발하는 티저를 선봉에 세운 것이다.


 역시 색채의 마술사다운 도입부였다. 시작부터 무척이나 아름다운 색채가 눈을 황홀하게 했다. 하늘뿐만이 아니라 땅, 땅 위에 피어난 식물들의 질감까지 아름답게 구현해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조금 부작용이 있지 않나 싶었다.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인물의 행동보다 그 배경과 색채에 눈이 가기 때문이다. 나아가 색채와 배경에 주목한 나머지, 스즈메(주인공)이 폐허를 서성이는 장면이 조금 긴 듯한 느낌이 들고 흐름 자체가 초반부터 늘어진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작품과는 다른 도입, 티저를 선봉에 세운 시도는 좋았으나 오히려 전작처럼 현재의 주인공 시선으로 시작하는 것이 무난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여전히, 비는 아름다웠다.


 작품의 중간중간에서 많은 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이전 영화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모든 영화에 비는 참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이번 작품에서 비는 상황의 변화 및 전환, 인물의 성장을 나타냈는데 비가 내리는 타이밍이 소름돋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비가 이렇게도 아름답게 떨어질 수 있다, 라는 것을 자신있게 보여주려는 듯 했다. 하늘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와 조금씩 내리는 비, 무언가가 사라지면서 비처럼 내리는 연출, 돔 모양을 그리며 상쾌하게 터지는 비. 이 모든 빗방울들에 담긴 감정과 색채는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언어의 정원 중 비가 내리는 장면

 어촌이나 버스정류장과 같은, 작품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공간적 배경마저도 대단히 상세하게 표현한 것이 그런 반짝임을 극화시키지 않았나 싶었다. 또한, 로컬라이징이 되어 있어서 분위기에 더욱 빠질 수 있었다. 흔히 원어인 일본어로 남겨놓는 것들, 이를 테면 등장인물이 가볍게 잡아서 책꽂이에 꽂아버리는 책이나 운전하면서 듣는 노래의 제목 같은 것들 중 몇몇이 한국어로 바뀌어서 상영된 것이다. 이것이 작품에 대한 몰입을 더욱 강화시켰던 것 같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스즈메가 된다


 도입부에서 주인공인 스즈메가 소타를 만나기까지, 나는 그저 일본 여고생의 다큐멘터리를 멀리서 직관하는 한국인에 불과했다. 조금 진부한 장면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오히려 그랬기에 훅하고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무난하고 평화롭게 진행되는 부분들에서 소위 '지브리 감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보며 힐링하며 시청하고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부터 나는 스즈메가 되었다.

귀여워 보이지만, 마냥 귀엽지만은 않은 존재이다. '다이진'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 고양이 같은 존재가 등장하고 나서부터는 영화의 흐름이 대단히 변화한다. 무난하고 평화로웠던 것들은 온데간데없고 급박하고 불안한 상황으로 빠져들어버렸다. 일부러 평화로운 감성을 앞에 두어 관객들을 방심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대단히 파격적인 전환이 있다. 이 전환 이후로부터는 팝콘을 먹는 사람이 없었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스토리 진행이 빨랐고, 그 분위기과 소리 속에서 다른 소리를 더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아니, 더하기 싫었을 것이다. 무척이나 절망적인 상황의 씬인데도, 그 장면의 하늘이, 그 장면의 소리가, 몽환적이고도 강렬한 색채로 피어났기에. 우리는 색채에 한 번, 스토리 흐름에 한 번, 총 두 번의 몰입을 당하게 된다.

 


과거에 담아둔 것들


 이 작품에서 '문'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나는 '과거와 현재를 비춰주는 것'으로 보았다. 문을 닫는 행위는 과거를 이해하고 수용하며, 더 이상 과거에 매이지 않겠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느꼈다. 과거를 수용하는 것과 과거에 끌려다니는 것은 다른 것임을 확실하게 인지시켜준 장면이 너무 감동이었다. 문을 닫으러 가는 과정에서 인물 간의 감정이 교환되고, 그러한 교환 속에서 '과거에 담아둔 것들'이 흘러나온다. 과거에 존재하기에 아름다울 수 있고, 과거에만 존재하기에 아플 수 있는, 멋진 감정들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것을 유쾌하지만, 대단히 애잔하게 전달해주었다.

과거의 감정 때문에 현재가 아프다면, 그 감정들을 모두 끌어모아서 문을 닫고 문단속을 해보는 건 어떨까.

 어차피 과거의 일이니까-같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일에 대해 온전히 아파하고, 완전히 기뻐하되 그 감정과 그 시대의 시점에 빠져 현재를 소비하지 말아달라고 절절하게 부탁하는 것이다. 지금의 자신이 어떠한 기분인지를 알아보는 것, 지금의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용기 있게 뱉어내는 것, 지금의 자신이 머뭇거리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 그 세가지가 얼마나 빛나오르는 일인지, 이 문을 여닫는 행위가 알려준다. 


은은한 화려함


 폭발하는 감정선이 없다. 언어의 정원에서처럼 주인공이 오열하거나 심하게 자조적으로 변모하는 장면이 없었다. 밋밋하다고도 볼 수는 있겠지만, 나는 그 가능성에 동의하지 않는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모든 작품에서 감정은 은은하게 표현된다. 그런데, 이번 작품이 특별히 더 은은하다. 오히려 더 여운이 남았다. 등장인물들의 대사에서 소리의 고저가 크지 않았기에, 작품의 분위기 속에 더욱 녹아들 수 있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심리에 더 주목하게 되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과한 울음을 통해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제시하는 것보다 이렇게 은은하게, 대사 몇 줄이나 침묵을 통해 인물의 심층에 있는 감정선을 조금씩 드러내는 방식이 너무도 슬픈 아름다움과 함께 비춰졌다. 그래, 은은한 화려함이란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영화 스틸컷

부작용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인상 깊게 본 영화들에 한동안 취해버리는 습관이 있다. 이번 영화도 그렇다. 일단 하늘을 주시하며 어디선가 무언가가 튀어나오지 않을까하는 망상에 사로잡히는 일이 잦아질 것 같다. 또한 열쇠를 하나 제작하여 목에 걸고 다니는 기행도 일삼을 생각이다.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문을 잘 잠그는 단속이다.

그것이 집의 현관문이 되었든, 자신의 과거의 담은 문이 되었든, 자신의 현재 감정이 갇힌 문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문 관리를 멋지게 해내는 사람이 되자, 작은대!


*처음으로 브런치에 글을 써보았습니다. 많이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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