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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몰룸 Jul 01. 2024

한 번도 차별받지 않은 것처럼

거절의 이유 03

몇 달 전 옆 동네에서 있었던 일이다. 동네 떡볶이집에 초등 어린이 넷이 가서 1인분을 주문했다. 두 사람이 주문한 거였고, 다른 두 사람은 다리가 아파 잠시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고 싶었다. 그러나 떡볶이집주인은 주문하지 않은 둘이 앉으려면 5만원을 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둘은 밖에서 기다리고 다른 둘은 테이블에 앉아서 떡볶이 1인분이 나오기를 (아이들 추정) 30분을 기다렸다고 한다. 대형 팬에서 이미 조리돼있는 떡볶이를 접시에 담기만 하면 되는데, 무슨 사정인지 가게 안의 모든 서빙이 끝날 때까지, 심지어 더 늦게 들어온 주문이 다 처리될 때까지도 아이들은 기다려야 했다. 이 사실을 아이의 일기장을 보고 알게 된 한 엄마의 이야기와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이 이어졌다. 특히, 이 분식점에 아이들만 간 경우와 부모님을 동반한 경우의 응대가 각각 달랐다는 이야기는 씁쓸했다.     


1인분을 산정하기 애매한 분식점의 경우라도 1인 1 메뉴 방침이 명확하다면 먼저 안내가 되면 좋지 않았을까. 부득이하게 1인분을 주문한 아이들이 잠시 동석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할 때 업주의 대응은 1) 방침 상 추가 주문을 해야 앉을 수 있다 또는 2) 이번에는 앉을 수 있지만 다음부터는 점포 방침을 지켜달라는 중의 선택이어야 했다. “앉아만 있으려면 5만원을 내라”는 말은 사실상 충족시키기 어려운 요구로 아이들을 좌절시키는 응대이며 모멸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아이가 아니라 어른에게도 같은 응대를 할 수 있는지, 아이를 한 명의 고객으로 생각한 것인지 묻고 싶다.      


며칠 전 접한 또 다른 상황은 이러했다. 자연 친화적인 한 카페에 <No boy zone> 공지가 올라왔다. 만 4~8세 남자 어린이는 출입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카페 공지를 그대로 올려본다.   



이 글로 미루어보아 안전사고가 빈번한 영업 환경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잘 통제되지 않는다 해서 “4~8세 남자아이”로 적시된 성급한 공지를 꼭 올려야 했을까. 더구나 이 카페에는 즐겁게 뛰어노는 (4~8세 추정 남아 포함) 아이들의 사진 리뷰가 꽤 올라와 있어 누가 봐도 가족 모임을 하기 좋은 공간이라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다 점주는 하나하나 감사의 댓글까지 달았다. 


이 이야기를 주변에 무작위로 해보았다. 그중 절반 정도가 차별은 반대하지만 업주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했다. 남자아이들은 위험하다, 부모들이 더 문제다, 나도 노키즈존이 좋다는 답변은 양육자들에게서 더 많이 나왔다는 점이 놀랍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벌레 한 마리만 이 (쾌적한) 공간에 들어와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거든요. 우리는 다른 종을 배격하면서 나한테 걸리적거리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생명체를 만나면 다 죽여버려요(...) 사실 인간의 가장 큰 적은 편리예요. 잘못된 것을 없애는 것이 문제 해결이라면 잘 해결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은 콕 집어서 없애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조금 더 불편해져야 해결이 되는 거예요.” 

    

일본 여행에서 돌아온 후 계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일본의 대중교통과 길거리에서 장애인들을 많이 보았다. 일본에 특히 더 장애인이 많은 걸까? 검색 결과는 장애인 이동권이 보장된 선진국의 실태를 확인해 주었다.      


일본에서 시위를 이어간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대표의 말이다.      


“일본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지하철을 타면 반드시 역무원이 함께 동행해서 지하철에 잘 맞추어진 발판을 대비하더군요. 그렇게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의 간격과 단차 문제를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승객이 내리는 곳을 미리 파악한 후 안전하게 내릴 수 있도록 하차역에서도 역무원이 발판을 가지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전장연은 2021년 12월 3일부터 2024년 4월 8일까지 총 61차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했다. 지하철은 시위 중인 장애인을 태우지 않고 무정차로 달렸고, 시위로 인한 열차 지연 등의 손실금을 전장연에게 부담하는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제때 시행되지 못한 정책 때문에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장애인 이동권이 존재하는데도, 비장애인의 이동권을 침해했다는 명목의 손실금만 재빠르게 환산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아파서도, 나이 들어서도, 심지어 어린 시절을 가져 서도 안 되는 것이다.      


“불평등한 세상을 고치자는 목소리가 불편해서 듣기 싫다면, 그건 그냥 차별의 동조자일 뿐이다.” 

(위근우 <뾰족한 마음>, p.158, 시대의창)     


아이들이 가지 못하는 카페가 이미 있는데, 언젠가는 아이들이 없는 떡볶이집도 등장할 모양이다. 언젠가는 장애인은 한 명도 없는 지하철과 버스에서 장애인 좌석의 효용성을 물을 날이 올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들은 어쩌면 이런 차별의 그늘 아래 숨죽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에 안 보인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설국열차는 꼬리칸을 달고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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