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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몰룸 Jun 24. 2024

쓰미마셍은 거절이 아닙니다

거절의 이유 02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오랜 일본 영화의 팬이지만 방문은 처음이었다. 일본어는 히라가나를 겨우 읽을 뿐, 생활회화는 거의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아리가토고자이마스’를 읊조리며 떠났다. 그마저도 힘든 가족들은 이런 나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행이 끝나고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아이가 맨 처음 한 말은 “이제 ‘쓰미마셍’ 안 써도 되겠네”였다. 그만큼 우리가 제일 많이 입에 달고 다닌 말은 ‘아리가토고자이마스’가 아닌 ‘쓰미마셍’이었다. 


‘쓰미마셍’은 미안합니다. 혹은 실례지만, 저기요 같은 의미로 쓰이고, 심지어 감사한 상황에도 사용된다. 우리말로 ‘저기요’ 하는 것보다 ‘쓰미마셍’이라고 하면 어쩐지 공손한 태도가 곁들여진다. ‘저기요’는 나의 어떤 용무를 위해서 부른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에서 “죄송하지만….”이라고 시작할 때는 정말로 죄송한 일이 덧붙여지는 경우가 많다. “죄송하지만 이번엔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oo는 안 됩니다.” “죄송하지만 oo(내키지 않는 일)를 해주시겠습니까?” 한글로 인터넷 창에 “죄송하지만”이라고 치면 이어 나오는 문장들이다. 어쩐지 상대방의 언짢은 기분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태도를 한껏 낮춘 듯한 자세가 그려진다. 우리말에서 ‘죄송하지만’은 완곡한 거절로 이어지는 역접 부사다. 그래서 ‘죄송하지만’이라는 문장의 오프닝을 들으면 ‘아. 뭐가 또 안되는구나’하는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그 안에는 그 말을 듣는 당사자가 얼마간 죄송할 일을 제공했다는 힐책의 뜻이 담긴 경우도 있다. “죄송하지만 어린이는 입장이 불가합니다.” 흔한 노키즈존의 안내문이다. 아이와 함께 간 것이 잘못이라는 듯이 눈앞에서 문이 닫힐 때 마음도 같이 닫힌다.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저희와 함께하기 어렵겠습니다.” 이런 말도 어떨 땐 꽤 상처가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죄송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쓸 일이 별로 없는 말이기도 하다. 매사에 나는 ‘죄송합니다’ 보다는 ‘고맙습니다’를 의식적으로 더 많이 쓰려고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일본에서의 ‘쓰미마셍’은 그 뉘앙스가 다르다. 어떤 말이든 앞에 '쓰미마셍'을 붙이면 뭔가 산뜻한 매너가 형성된다. 카페나 식당에서 주문할 때 “쓰미마셍~”은 기본이다. 내가 손님 자격으로 주문을 하는 거지만, 마치 가게 직원의 시간과 관심을 돌리는 게 송구스럽다는 듯이 쓰면,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모르는 길을 물어볼 때도 ‘쓰미마셍’으로 시작해 ‘아리가토고자이마스’로 끝나는 대화는 뒷 맛이 개운하다. 일본 여행에서 아이는 ‘쓰미마셍’이 입에 붙어서 열심히 쓰고 다녔다. 우리나라에서 식당에 가면 아이의 우렁찬 ‘저기요!’ 때문에 당황했던 적이 있는데, 일본에서 아이가 쓰는 ‘쓰미마셍’은 왠지 마음이 한결 놓였다.


일본 여행에서 자신 있게 쓰미마셍을 쓰고 다니다가, 귀국하자마자 공항철도에서 서로 가방을 막 부딪쳐도 대부분 ‘쓰미마셍’조차 하지 않는 차이를 아이는 단박에 감지했다. 거기서 아이의 ”우리나라에 오니 이제 쓰미마셍 쓸 일이 없네 “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쓰미마셍을 써야 하는 상황인데 아무도 쓰지 않으니 낯설게 느껴진 거다. 

 

무턱대고 우리나라는 무례하고 일본은 공손하다는 뜻으로 쓴 글은 아니다. 일본에 며칠 머문 것으로 한나라의 문화를 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부드러운 말 뒤에 그렇지 못한 마음이 있을 수도 있다. 마음속의 말을 고르고 골라도 정작 투박한 언어로 튀어나와 버리는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것에 관하여는 [겉과 속이 같은 사람] 편에서 풀어낼 예정입니다).      


쓰미마셍은 거절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도 거절이 아닌 다양 의미의 ”죄송한 “ 사례들이 많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이것이라도 드리고 싶어요.’ ‘실례지만,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이제, 알고 있는 좋은 것들을 더 자주, 많이 사용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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