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아는 사람이 사는 곳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혼자서 가는 여행의 매 순간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밤이 되면 언제나 왠지 모를 적적함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낮 시간의 그 즐거웠던 여행도, 밤이면 찾아오는 적적함에 가로막혀 여운을 남기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이는 비단 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숙소에서는 물론, 버스, 기차, 비행기 무엇이 됐건 낯선 자극의 유입이 줄어드는 공간에서는 혼자 가는 여행의 적적함이 어김없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적적함은 여행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여행에 의해 그저 발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밤 같고 기차 안 같아서 적적함이 두드러지지 않던 삶이었지만, 분주한 여행의 즐거움으로 인해 적적함에 눈을 뜨게 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번 적적함에 눈을 뜨고 나면 더 이상 분주한 여행의 즐거움도 온전할 수가 없었다. 여유가 찾아오고, 생각이 멈추면 이내 적적함이 차오른다. 어쩌면 항상 가득 차 있던 적적함을 여행의 즐거움으로 잠시 덮어두었던 것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혼자 가는 여행의 적적함이 어디에서 오는지와는 무관하게, 더 이상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확실했다. 혼자인 것에 익숙해져 있는, 적적함이 일상이라 적적한지도 모르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리석은 사람이 그러한 것처럼, 다시 혼자서 여행을 가게 되었다. 독일로 유학을 간 선배가 건넨 제안들-숙소 제공, 돼지고기 바비큐, 관광 조언-은 적적함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기에 충분히 달콤했기 때문이다. 새해 다짐도 아닌데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 분하기도 했지만 비행기 표를 사는 데에는 그다지 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아는 사람이 사는 곳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 사는 곳으로의 여행에는 의외의 특별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낯선 언어로 된 표지판의 연이은 등장에 무력감을 느낀 눈이 누군가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을 발견했던 기쁨도, 비용 부담을 꽤나 덜어준 숙소 제공도, 먹고 있으면서도 먹고 싶었던 바비큐도 아니었다. 아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곳으로의 여행에는 혼자 간 여행도 혼자가 아닌 것처럼 만들어 주는, 그런 특별함이 있었다. 어떤 낮을 보냈는지와는 무관하게, 익숙한 누군가와의 만남이 보장된 밤을 맞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과 ‘돌아가서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 차이가 컸다. 혼자가 아닌 밤에서는 적적함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혼자가 아닌 밤에는 혼자서 보낸 낮 여행의 여운을 오히려 더 길게 남길 수 있었다. 낮을 가득 채웠던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이 사라진 밤이었지만, 새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낼 수가 있었다.
어쩌면 술에서 깨었는데 여전히 누군가와 함께 있는 새벽과 같았고, 치료를 받고 나오니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병원과 같았다. 즐거움이 사라진 허탈함도, 괴로움이 남겨둘 무력감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과 돌아가서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의 차이는 그렇게 큰 것이었다. 아는 사람이 사는 곳으로의 여행은 그렇게 특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