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부쩍, 아이의 어릴 적 사진을 본다. 할머니는 못난이라 불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눈엔 너무 예쁘다. 아이는 뭔가에 항상 골몰했고 종종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명쾌한 표현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곤 했다. 괜스레 이렇게 옛날을 뒤적거릴 때가 있다. 사진을 지긋이 바라보면 어느새 나는 그 풍경 속에 있다. 연남동 어느 가게에서 업어 온 다다미와 코타츠가 놓인 거실. 거기에서 고양이와 뒹굴고 있는 아이. 욕실 입구에 나란히 앉아 양치질을 하는 우리. 반지하였지만 남쪽으로 지대가 높은 1층 구조 덕분에 오전 햇살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 햇살을 먹으며 첫째는 아기에서 아이가 되었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출산을 기점으로 주변은 빠르게 고요해졌다. 갓난쟁이가 입을 쩝쩝 다시는 소리와 고양이가 책상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적막 속에서 엄마가 된 나는 바지런히 움직였다. 눈 뜬 시간도 몇 안 되는 아이에게 말을 거는 일은 어색했다. 하루 종일 뱉은 단순한 몇 마디가 그날의 대화가 되곤 했다. 어째서 다른 누군가와 말문을 열지 않았던 걸까. 정확하게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뿌연 기억 속에 나는 아이라는 바다에 온전히 흡수되어 세상 밖으로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듯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들은 아이와 건실하게 보내는 하루 속에서 잔잔하게 쓸려 나갔다.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시간만큼 쏟아내고 싶은 말들이 쌓여갔다.
이후, 육아는 나를 종종 침묵하게 했다. 말수가 적은 동거인, 대화라기보다 알고 있는 걸 말하기 좋아하는 첫째, 등을 돌린 채 대꾸도 않는 둘째. 어쩌면 흔한 풍경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데 나는 그 방식이 답답했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어 대화할 수 있는 것도 잠시 뿐, 집안에 정적이 흐르고 있다는 걸 의식한 건 둘째가 기관에 들어가고부터였다. 병원에선 언어지연과 자폐 성향을 언급했다. 둘째의 언어 발달이 도마에 오르자 뒤늦게 우리 사이에 마음의 주고받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억지로라도 생각을 쏟아내야 했다. 대답하는 이 없어도, 누군가는 계속 말을 꺼내야 한다는 것, 이제는 의무적으로라도 해야 했다.
'좋은 아침!'
'나는 동이 목소리 듣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아.'
'잘 자, 오늘은 무슨 꿈 꿀 거야?'
'난이는 꿈이 뭐야? 앞으로 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오늘 유치원에서 뭐 먹었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입에서 단물이 나게 질문하고, 부르고, 말 에너지가 방전될 쯤이면 말수 적은 동거인을 몰아세웠다.
'제발 말 좀 해!!'
원래 표현하는 걸 중요하게 여겼다. 감정의 상함도, 마음의 본질도 깊이 있게 들어가 살피고, 생각이 맞으면 그것에 대해 몇 시간이고 대화할 수 있었다. 정보 전달을 위한 대화에는 피로도가 높은 나와 유독 마음을 표현하기가 어려웠던 나머지 가족들은 서로의 주파수가 맞지 않았다. 생각을 말 하자는 나의 독촉을 그저 묵묵히 견뎠는지도 모른다. 억지로 꺼내는 말은 하는 이도 힘들었지만 듣는 이도 피곤했으리라. 그들로썬 고문이요, 나로선 단절을 깨고 싶어 무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집안에는 나만 말해.' 내 부름에 대답을 않는다고 고통을 호소하자 친구가 되물었다.
'꼭 대답을 해야 해?' 의외의 물음이 되돌아왔다. 어린 시절 말이 없던 친구는 말을 꺼내기가 싫었고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수다스럽고 누구보다 다른 이의 말을 잘 들어주는 그가 말이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말을 꺼낸다는 건 뭘까.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불러도 반응 없던 둘째가 관심을 보인 건 나의 그림책 더미였다. 응가를 대변기에 잘 싸길 빌며 하룻밤, 기관에 잘 적응하길 빌며 또 그다음 날 밤, 필요한 것이 좌절되었을 때 울음보다 말로 꺼내 주길 바라며 또 어떤 밤, 틈틈이 건네고 싶은 말을 그림과 글로 옮겼던 낙서 투성이 책을 보며 아이는 뜻밖에 웃음을 보였다. 신비로웠다. 책만 들여다보느라 세상을 등진 듯 한 뒷모습에 여러 번 무너졌더랬다. 그런데 그 책이 아이를 돌아보게 하고 있었다.
'어제 엄마가 만든 책이야.'
이른 아침, 잠이 채 달아나지 않은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와 바라본다. 그림 속 아이들은 누가 봐도 본인들. 아이들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어린다. 한번 읽기를 마치자 둘째가 외친다. "한번 더!" 이번에는 아예 책을 낚아채 둘이서 까르륵 거리며 읽기 시작한다. 어투를 흉내 내며, 상대방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어느샌가 둘이 대화를 하고 있다. '야, 동아, 이것 봐, 깔깔깔!' '누나 이것 좀 봐~~~'
아이들이 소통을 하고 있었다. 책을 나눠 읽으며 서로의 행동을 관찰하며 각자의 발견을 나눈다.
'재미있어?'
'응!'
간단한 대답이지만 아이가 나를 보고 있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아이가 나와 눈을 맞추고 대답을 해준다. 이토록 사소하고 흔한 행위를 나는 여태껏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의 웃음은 내게 긴긴 여운으로 남았다. 그날부터 아이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도 없이 봐온 아이들의 몸짓, 표정, 말투. 많은 작가들이 아이를 소재 삼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이들에게는 이미 커버린 어른이 줄 수 없는 강한 기운이 있다.
밤과 낮의 경계에서 작업을 이어가던 어느 날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둘째가 물었다.
"엄마, 어-제-는-뭐-그-렸-어?"
불러도 대답 않던 아이가 어느새 내 그림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억양도 발음도 어색하지만 엄마에게 표현하고 있었다. 첫째는 한 술 더 떠 아예 책을 만들어 나에게 보여준다. 그 안에는 아이가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다양한 마음이 들어있다. 화내는 엄마에 대한 시선, 말썽쟁이 동생에 대한 귀찮음, 자주 못 노는 아빠. 그리고 항상 마무리에는 적는다. 우리 가족들 모두 사랑한다고.
신생아 무렵 아이와 함께 한 풍경이 떠오른다. 아이도, 나도 말이 없었지만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서로에 대해 나누던 순간들이. 때론 시원하게 털어놓는 마음이 듣고 싶고 같은 공간 함께하면서 자주 답답하지만, 언어란 어떤 형태로든 서로에게 통했을 때 충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우리에겐 우리만의 연결된 무언가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을까.
말은 마음의 응답이다. 마음 없이는 그러니까 말도 없던 것이다. 그간 나는 너무 꺼내는 것에만 급급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렇게 작업을 이어간 지 1년째 되던 어느 날,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미팅을 하고, 작업 이야기를 나누고. 특별히 달라진 건 없고 여전히 나는 내 안에 고요하게 쌓여가는 이야기를 뱉어내고 있다. 그때에는 아이들이 내 손을 잡아 주었다면 이젠 온전히 나의 힘으로 움직여야 한다. 또 다른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는 창문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