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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재미양 Feb 05. 2022

당연한 것

"엄마, 헬리콥터는 작아 보이잖아. 근데 사실, 엄청 크다?"


책을 읽다 말고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눈이 왕방울만 하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딘가에서 놀다 말고 떠올랐는지 큰 발견을 알려주려는 듯 안달 난 몸짓으로 다가와 속삭인다.


 '비행기도 엄청 커.'


가끔 어린이가 건네는 말에 멈칫할때가 있다. 섵불리 대답이 나오지 않는, 조금 더 곱씹고 싶은 그런 말들이 있다. 그러면 쓸던 바닥에서, 씻던  그릇에서 눈을 떼 아이를 바라보곤 한다. 언제부턴가 아이는 나에게 이런 저런 말을 봄날의 제비처럼 물어다 날랐다. 유치원에서 배워오고 친구에게 들은 소소하고 놀라운 사실을 재잘거렸다. 한글날에는 세종대왕의 본명을(뭐더라), 공기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가물가물), 해는 얼마나 뜨거우며 지구는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 세세하게 고했다. 충치균이 이빨로 침투하는 광경을 설명하며 무시무시한 경고를 잊지 않고 바람의 방향을 알기 위해 풍향기를 만들어 온다. 예전의 작던 내가 티비나 책으로 접하던 조각같은 정보들을 거대한 덩어리로 뭉쳐 나에게 들고오는 듯 했다. 그러던 아이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 봤는데 작은 점인 줄 알았던 비행기가 사실은 그 크기가 아니었다는 걸 스스로 알아버린 듯했다.


이윽고 내가 대답한다. '맞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랬지.' 

아이가 신이 나 말한다. '엄마도 알고 있어?' 


응, 알고 있어. 

그런데 잊고 있었어. 


엄마에게 발견을 나눈 만족감에 아이는 의기양양 떠나고 나는 생각에 잠긴다. 하늘을 가로지으며 나는 비행기를 바라본적이 언제였을까.


세상이 시작된지 몇년 안 된 아이에게 지식이란 얼마나 새로운 발견일까. 그리고, 이제는 처음이랄게 많지 않아진 어른에게 아이란 존재는 얼마나 매순간 새로운지. 당연하게 나를 둘러쌓고 있었던 것들을 떠올려본다. 무심히 지나쳤던 하늘의 점은 물론이고 공기의 존재와 나무의 푸르름, 새싹이 자라나는 재미와 어려움, 길 곳곳 낮은 곳에 살아있는 생명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게 되어버린 무수히 많은 것들에 대해. 어느샌가 조금씩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던 것들에 대해.


처음엔 귀했다. 나무의 나이테만큼 겹겹이 쌓인 다른 지식에 뭍혀 어느샌가 당연해져버린 것들이 아이의 이야기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었기에. 마치 한두방울 잎사귀 끝에 모인 이슬이 매마른 땅에 떨어지듯 작은 입으로 전해주는 말들은 내 마음에 자국을 남겼다. 그래서 적었다. 귀하니 소중하고 소중하니 아껴서 기록했던 것 같다. 말뿐이랴. 아이가 색칠하고 그린 작은 쪼가리를 그러모아 상자에 보관하고 떡제본으로 이어붙여 책으로 엮기도 했다. 전화기에 몇만장씩 찍힌 아이를 시기별로 골라 인쇄해 앨범에 옮겼다. 아이의 작업들이 창고에 쌓이고 사진첩과 거실, 침실이 아이의 존재로 가득해지자 자연스럽게 그 귀하던 것도 당연해졌다. 하늘을 나는 작은 점처럼, 나무의 푸르름처럼, 새싹의 씩씩함처럼.


어쩌면 사소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와의 생활이 일상이 되자 내가 하고 싶던 것들이 생각났으니까. 이쯤이면 괜찮지 않을까, 조금씩 손을 떼는 건 어떨까. 아이의 성장 속도를 나의 더딘 기록이 따라잡을 수 없다 느낄무렵, 나 자신의 작업을 시작했다. 어찌보면 아이의 속도가 지지부진한 내 마음을 등떠밀어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의 생각에 골똘하느라 많은 것들이 사소하게 흘러갔다. 아이는 어김없이 나를 어른의 중대한 동굴에서 끄집어냈지만 엔진 고치기에 여념이 없던 생텍쥐페리의 비행사처럼 거칠게 그린 상자 그림을 던져주며 '이게 양이야!'하는 꼴로 얼랑뚱땅 아이의 말을 넘겼다. 


귀함은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아이와 비행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등원길 하원길 왠지모르게 하늘에 시선이 갔다. 비행기를 찾다가 구름이 보였다. 몽글 몽글 솜뭉치같은 구름이 잠깐 눈을 떼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해 있고, 파아란 하늘과 얼마나 맑은 대조를 이루는지 다시금 보게 되었다. 


식물도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다. 풀은 풀이지 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풀이 가진 곡선이 예뻐보이고 어디선가 읽은 자연을 모방하는게 예술의 시작이라는 문구도 여운이 남았다. 아이와 식물은 함께 하기 어려운 일일런지도 모르겠는데 산책을 하다, 지나가다 어느샌가 꽃집에 발길이 닿아 뾰쪽하고 단단한 몸통부터 하늘하늘 퍼진 모습까지 꼼꼼히 살펴본 후 꼭 한 화분씩 데려왔다. 그렇다고 특별히 그 식물을 사랑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말없는 생명을 키운다는 건 보이지 않는 언어가 발달해야하는 것인데 난 그 부분에 연습이 부족했다. 소중히 모셔온 식물들은 틈틈히 돌봤지만 모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자꾸 식물들이 마르거나 썩으니 식재료 관리만큼 손이 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는 단순히 나이를 먹었기에 풀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나이 든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생물작용처럼 풀도 그즈음이면 굽어보게 되는가보다 어른이란 따분하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식물을 보고 비어있는 공간을 시선으로 채우면서 아이도 식물도 굽어보다보니 어느새 좋아졌다. 밤이 되면 잎사귀를 오므리면서 잘 준비를 같이 하고 햇빛이 닿으면 환하게 웃어보이듯 색이 변했다.


당연한 것에는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식물의 시간도, 아이로써의 시간도 사실 찰나인 것을. 아이가 발견한 하늘의 작은 점도 주변에 흔하게 보이는 풀의 제각각 모습도 나를 처음 마음으로 붙들어준 듯 하다.


그래서 오늘도 새삼스러운 고마움을 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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