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나는 엠마가 되었다.
사촌동생이 우리 집에 왔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였다.
한국말은 어색했고, 영어가 훨씬 편한 아이였다.
그 애의 영어 발음은 매끄럽고, 말할 때마다의 손짓이 자연스러웠다.
익숙하지 않은 리듬이 우리 집 거실 안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언니는 은진, E로 시작하잖아. Emma 어때?"
그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종이에 썼다.
E-M-M-A
볼펜 끝이 종이를 스칠 때마다 새로운 사람이 되는 기분이였다.
"그럼 나는?" 서진이가 물었다.
"너는 S로 시작하니까...Sarah!"
서진이도 곧장 볼펜을 들고 따라 썼다.
"한국 사람들은 두글자 이름이 부르기 편해.
엄마는 둘다 마음에 들어."
엄마는 우리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엔 기쁨과 부러움이 섞여 있는듯 했다.
"나는 백합을 좋아하거든. Lily 는 어떨까..."
엄마의 말이 조용히 식탁 위로 떨어졌다.
순간 사촌동생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그건 R하고 L이 비슷해서 발음이 어려워요."
잠시 종이를 내려다보던 엄마가, 천천히 다시 웃었다.
"그럼 난 됐어. 난 영어 이름 없어도 돼."
"왜 엄마, 엄마도 하나 해. 이게 뭐 어렵다고..."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가 백합을 좋아한다는 걸.
이상하게 가슴 한편이 불편했다.
아빠는 두 팔을 끼고 있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색한 공기를 바꾸려는 듯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는 그냥 Mr. Han 으로 할게, 좋네, 미스타 한!"
너희는 학교도 다니고, 회사도 다닐테니까 너희만 있으면 돼.
엄마 아빠는 없어도 되지."
아빠의 말끝에 어색한 웃음이 걸렸다.
Emma, Sarah, 미스타 한.
그리고 이름이 없는 우리 엄마.
테이블 위엔 또박또박 쓴 이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영어 이름을 얻었지만,
엄마와 아빠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이름을 지킨 걸까,
아니면 새로운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선 걸까.
가끔,
엄마의 Lily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