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by 작은산

성탄절 이른 아침이었다. 분리수거장에서 쓰레기를 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뛰어와 엘베에 탔다. 손에는 영어 문제집으로 보이는 책을 들고 있었다. 헐레벌떡 뛰어온 학생은 내릴 층 수의 버튼을 누르자마자, 한 손으로 책을 받치더니.. 쥐고 있던 펜으로 필기를 해가며 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은 내가 그러니까 약 20여 년 전 수험생 시절, '학교'에서나 봐오던 그런 장면이 아닌가. 머리를 푹 숙인 채로 정말 책과 혼연일체가 된 학생. 근데 여긴 학교도 아니고.. 그냥.. "아파트 엘베"인데.. 여기서까지 공부를 하는 학생을 보며.. 뭔가 괜히 설렁설렁 사는 내 삶을 반성하게 되었다. 이 짧은 이동시간조차 이 학생에게는 간절한 시간이구나.. (내 시간을 줄 수 있다면.. 좀 줄까.. 어차피 나 집에 가면 <나는 솔로> 지난주 못 본 거 보려고 했는데.. 미안해.. 학생.. 아저씨가.. 시간을 이렇게 써서..)


학생의 손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눈빛은 책이 뚫어질 것 만 같이 매서웠다. 초 몰입의 상태. 이 상태로 코로나팬더믹 2020 인천공항 입국 통로의 열화상카메라를 지나간다면 아마 세큐리티에게 잡힐 것 같은.. 어쨌든 뭔가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초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사는 누군가의 모습을 오랜만에 목격하니, 내가 막 마음속 한켠이 뜨거워졌다. '그래, 맞아, 나도 저렇게 몰입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있지 않던가!' '시간이 가는 걸 아까워하며 일분일초 밀도 있게 살아본 적이 있지 않았던가!' 좋아 나도 이제 더 이상 시간 허비 말고 흘려보내지 말고 단단하게 꽉 차게 살아보자.


연말연시에 그 학생에게 받은 감명 대로 나는 부지런하게 살고자 했다. 조금 나태해지고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순간이 오면 그때 그 학생의 간절한 눈빛, 필기하는 대로 흔들리던 앞머리.. 주변 신경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내 앞에 있는 독해지문만이 존재하는 저스트 투 오브 어스.. 초몰입의 상태. 누가 그랬던가 사람 이 가장 멋있을 땐 무언가에 몰입하는 순간이라고. 나는 그때 그 학생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 어린이와 놀이터를 나와 놀다가 무심코 위를 쳐다봤는데,

우리 라인 고층에 ‘중고등 영어교습소’ 현수막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 라인에 영어과외가 있구나..’

‘영어과외.. 영어? 과외? 영어과외???’



불현듯 그때 그 학생이 생각났다.


학생이 눌렀던 엘리베이터 층수는..


그래, 18층.


현수막이 붙어있는 층수를 세어본다.

하나 둘 서이 너이 다섯여섯... 십오십육십칠.

십팔..(욕 아님)


시신경을 통해 들어온 이 정보는 내 뉴런들로 전달되고 전전두엽이 순식간에 흩어져 있던 퍼즐들이 껴맞춰지기 시작했다. (커넥팅 더 닷츠..허허..)


그래.. 그랬던 거구나.. 그때 그 엘베 학생의 치열하게 몰입한 그 눈빛은 숙제를 못해 과외방 들어가기 직전 그 엘베에서까지 해야만 했던 간절함에서 나왔던 것이었구나, 그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색다르게 리듬을 타는 필기 위의 여학생은 그저 숙제를 미처 하지 못한 자의 초조함이었구나..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던, 삶의 열정의 불을 다시금 불러일으켜 주었던, 그 학생은 사실은 진실이 아니었음을.. 나의 학창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음을.. 합리적 추리로 알게 된 것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또 다른 의미로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내가 처음 판단한 열정적인 학생의 모습이 사실이든, 아니면 그저 과외 숙제를 미처 못해 과외 가는 길에서까지 해가야 했던 불쌍한 모습이 사실이든, 그것이 어떤 게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성탄절 엘리베이터 안, 그때 내가 자극을 받아, 결의한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치 유태인 학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쓴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는 이런 멋진 글귀가 있다.


인간이 가진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는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이다.


갑자기 분위기가 너무 진중해지는 느낌이지만..ㅎ 요는 주어진 환경이 아무리 개떡 같아도 찰떡같이 받아들이면 된다는 깨달음이었다.


아무것도 바뀔 수 없는 똑같은 상황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그 학생을 내가 물론 오해했지만(ㅎㅎ) 나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나눠준 경험으로 세이브 할것인지 그냥 웃픈 배신감을 느낀 해프닝으로 기억에 저장할 건지는 내 태도의 선택인 것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그 어떤 독재자도 직장상사도 해병대선임도 심지어 시어머니도 일절 건드릴 수 없는 나의 자유권한인 것이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편 139:8
*스올=지옥


내가 지옥에 있을지라도 그곳이 지옥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지옥이 아니다. 반대로 그곳이 천국이라도 지옥이라 생각하면 지옥이다. 정말로 세상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



작가의 이전글[3부작]내 몸에는 2.5cm 시한폭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