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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un 07. 2021

그 섬에 자꾸만 가고 싶어지는 까닭

_ 강화 책방 <시점>에서 보낸 하룻밤 이야기

#그곳에서점이없었다면_3



폭풍이 오고 있다고 했다. 

“우리, 여행은 다음에 갈까?”

아이는 절대 안 된다고 한다. 하긴, 여름 내내 친구들도 못 만나고 유치원에도 제대로 못 가고, 여행 한번 제대로 못 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끈적한 한여름, 에어컨을 내내 켜 두고 집에만 머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벌써 어디로든 떠났을 일이다. 아이에게 언제까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이 환란의 감금 시대, 그 결과는 고스란히 아이들이 짊어지고 있다. 그래, 가자. 설마, 폭풍에 차가 길에서 떠밀리거나 하지는 않겠지. 


짐은 단촐하게 꾸렸다. 아이랑 둘만 떠나는 여행은 오랜만이다. 작년 봄, 제주에서 꿈결처럼 보냈던 한 달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여유롭고 편안한 시간이 되었으면 싶었다. 


“엄마, 바람이 보여!”


정말이었다.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은 나무들을 눕게 하고, 펄럭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흔들어대고,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가로등까지 기우뚱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계속 가는 게 맞는 걸까? 다행히 초보운전자 엄마의 불안은 아이에게까지 전염되지는 않았다. 


목적지인 책방 <시점>까지는 차로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다. 하늘은 조금씩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한참이었으나, 두터운 먹구름이 해를 가렸다. 아침에 출발한 차는 한 시간 만에 밤이 되어 버린 강화도에 무사히 안착했다.      


망! 망망! 

동네 바람둥이 황구 아빠와 닥스훈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전등이와 마니가 우리를 보고 짖어댔다. 강화에 있는 책방이니 전등사, 마니산의 이름을 빌려 쓰는 것이 퍽 자연스럽다. 아직 아기들이다. 제딴에는 맹렬하게 짖어대는 중인데, 소리가 멀리 퍼지지 못하고 입 안에서만 뱅그르르 돌다 바깥으로 나오는 소리는 조금밖에 못 된다. 그저 귀엽기만 하다. 내 눈에는 이 녀석이나 저 녀석이나 똑같이 생겼는데, 아이는 단번에 구분해 낸다. 


“봐봐, 둘이 완전 달라. 저기 꼬리가 말린 애가 전등이야. 엄만 그것도 몰라.”


그것도 몰라서 미안하구나. 아이 말을 듣고 보니 꼬리가 말리지 않은 마니가 다른 강아지보다 조금 더 까칠한 눈빛인 걸 알겠다. 강아지들도 별 볼 일 없는 나 같은 어른보다는 아이가 더 좋은 모양이다. 아이 발치를 뛰어다니며 망, 망망, 아까보다 한결 수그러진 소리로 작게 짖는다. 바야흐로 언제 비를 쏟아낼까 호시탐탐 노리는 회색빛 하늘을 배경으로 푸른 잔디밭을 질주하는 아이와 두 마리 강아지, 참 보기 좋다. 오길 잘했네.     

 


“책방을 열기 전까지 우리는 모든 일을 함께 고민하고 결정하고 행동했다. 2년 동안 운영한 팟캐스트가 그렇고, 집 짓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자선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때로 삐걱거렸고 대체 이걸 왜 하고 있는지 싶은 회의가 들 때도 있었지만 함께한 일은 대부분 행복했다. 그 결실로 우린 집을 지었고 책방도 열었다. 동화는 여기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현실엔 그런 엔딩이 존재하지 않았다.”(셋이서 집 짓고 삽니다만, 195)     


이 책방은 부추와 돌김(조은선과 안병일, 부부), 우엉(김민정, 부추의 후배) 세 사람이 함께 꾸린 집이자 책방이다. 책방에 오기 전에 세 사람이 함께 쓴 책 『셋이서 집 짓고 삽니다만』을 미리 주문해 읽었다. 인터넷서점에도 팔고 있었지만 굳이 책방에 전화해 ‘돌김’에게 주문을 하고 우편으로 책을 받았다. 북스테이를 하러 가는 손님으로서 예를 다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책 택배로 보내 드렸어요. 책 재미있게 보시고 곧 뵐게요. ^^” 책 한 권을 주고받는 데도 사람이 느껴졌다. 인터넷서점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북스테이 예약한 날까지 조금씩 아껴 가며 책을 읽었다. 책에는 햇빛을 맘껏 쬘 수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고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세 사람이 강화도에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과정이 촘촘하게 담겨 있었다. 남이 집 짓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손에 땀이 났다. 이쯤에서 크게 싸우지 않을까? 이러다 우엉이 집을 나가면 어떡하지? 돌김과 부추는 자신들의 선택을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떤 드라마보다 긴장감 높은 기록이었다. 막상 책방지기 돌김을 만나서는 이런 독후감을 전하지 못했다. 슬렁슬렁 편안한 걸음으로 책방 여기저기를 돌보고 있는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지는 게 좋았고, 전등이랑 마니를 붙들고 마구잡이로 뽀뽀하는 모습 또한 보기 좋았다. 신발 하나를 몰래 훔쳐다 마구 물어뜯으며 해맑게 행복한 녀석들을 혼내는 순간에조차 말갛게 떠오르는 웃음이 좋았다. 고민과 질문, 다름과 대안을 모색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큐레이션했다는 책방을 닮은 사람이었다. 세 사람이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데 심각한 문제가 없어 보여서 왠지 안심이 됐다. 


세 사람이 집을 지어 이사한 날인 2019년 3월 5일로부터 1년이 조금 더 지난 때이니 겪은 날들보다 겪어야 할 날들이 더 길 것이다. 이 사람들이 이곳에서 오래도록 편안했으면 좋겠다. 일요일마다 각자 보낸 일주일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에게 감사와 격려를 보내고, 불편했던 점들을 이야기하며 배려하고 조화를 이루려 애쓰는 노력이 예쁜 열매를 맺어 주면 좋겠다. “이들은 내가 어른이 돼서 스스로 선택한 동반자들이다. 서운한 건 서운한 거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같이 살아야 한다.”는 성숙한 부추의 이야기에 결혼 10년이 넘은 나조차 배운다. 세 사람의 성숙한 선택의 결과가 이처럼 아름다워서 다행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우린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예요, 맹세코. 나는 내가 읽은 책을 당신도 같이 읽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밀리아가 그 책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 아내가 되어 주세요. 당신에게 책과 대화와 나의 온 심장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에이미.”(섬에 있는 서점, 193)     


앨리스라는 섬에 있는 작은 서점 ‘아일랜드’의 주인 에이제이가 출판사 직원 어밀리아에게 청혼하는 장면이다. ‘책=대화=심장’을 하나로 엮어 하는 약속이 인상적이다. 대체 어떤 사람이 책과 심장을 같은 선상에 둘 수 있을까.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읽은 책을 상대도 똑같이 읽고,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이야기하면서 영혼을 들여다보며 두드리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그들은 알 것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 그리 호의적이었다고 말하기 힘들고, 에이제이가 아내를 잃고 망가진 일상을 추슬러 겨우 마음을 열었을 때는 어밀리아에게 애인이 있었다. 엇갈리는 시간이 길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꾸준히 서로에게 다가갔다. 책방 앞에 버려졌던 바구니 속에 들어 있던 마야를 입양해 키우는 동안 에이제이 역시 진짜 어른이 되어 간다. 아름다운 소설이다. 누군가는 너무 뻔하게 착해서 지루하다고도 하지만, 추운 겨울밤 위로가 되는 책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책방 <시점>에 머무는 동안 이 책이 계속 떠올랐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세상이다”라고 새겨진 간판 아래서 사랑을 일구고 삶을 이어가던 에이제이와 어밀리아, 그리고 마야에게 부추와 돌김, 우엉의 모습이 겹쳐졌다. 좋은 이들과 함께 독서 모임을 열고, 지역에 뿌리내리려 애쓰는 모습이 예뻤다. 조금 심심하더라도 이 소설처럼 드라마틱하게는 살지 말고, 안온하고 평화롭게 일상을 이어가 주었으면 싶었다.  

    

책 읽고 쉬는 곳

풍경 보며 멍 때리는 곳

마니&전등이랑 노는 곳

책 한 권 사는 곳

밤에 따뜻하고 조용한 곳     


입구에 세워 놓은 칠판에 하얀 분필로 정성껏 써 넣은 글귀를 한참 바라보았다. 아이는 세 번째 항목을 온몸으로 누렸다. 잘 놀다가 으르렁대며 이빨을 내보이는 두 녀석은 간식을 주는 손 앞에서 순식간에 얌전해졌고, 간식을 얻어 녀석들 앞에서 “앉아!” 하며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된 아이는 한껏 의기양양했다. 둘이 으르렁거리고 노는 것만 봐도 한시절 잘 가겠다.


한참 동안 책방에 우리 말고 다른 손님은 없었다. 래핑된 책도 뜯어 봐도 된다고 하고, 진열된 책도 얼마든지 가져다 보라고 한다. 1층 방에 짐을 풀고 책방 구경을 하는데, 다락방을 예약한 여자 손님 두 명이 들어왔다. 낯선 사람을 경계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코로나19의 가장 나쁜 점이다. 서로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배려한다.      


콰쾅! 

난데없는 폭탄 소리에 잠이 깼다. 무슨 소리지? 얼떨떨하다가 여기가 강화도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설마 폭탄 소리? 긴장되기 시작하는데 다시 한 번 콰쾅!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아, 천둥이다. 


책방 1층에는 아이와 나, 둘뿐이다. 방문을 열고 책방으로 나가 보니 주룩주룩 비로 가득한 대기가 바로 내다보인다. 낮에 용케 비를 안 쏟고 버티더니 밤이 되어 신나게 내리붓는다. 작은 등을 켜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런 고즈넉한 시간, 오랜만이다. 창문 너머 보이는 것이 아파트 앞 동이 아니라 어두운 산자락이어서 좋고, 책으로 가득한 책방을 나 혼자 개인 서재처럼 누릴 수 있는 것도 좋고, 빗소리 말고는 어떤 인위적인 소리도 끼여들지 않는 것도 좋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들리는 콰과광! 

괜찮을까. 강화도에 며칠 더 머물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엄마, 까치들이 고양이 밥 훔쳐 먹어!”


뭐? 빗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느라 아침이 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혼자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간 아이는 창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물까치 떼가 길냥이들 먹으라고 둔 밥그릇에 남은 사료를 먹는 걸 보았던 것이다. 아까부터 강아지들이랑 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아이는 떼로 몰려다니는 물까치가 전깃줄에 조로록 앉아 있는 걸 보고는, “나빠, 도둑들!” 하며 종주먹을 날린다. 

어차피 빗물 때문에 젖어서 고양이들은 안 먹을 거야. 그거라도 먹게 두자. 도저히 잠이 안 깨서 속으로만 말을 삼킨다. 도시에선 보기 힘든 물까치, 그 길고 멋진 꼬리를 고작 고양이 밥도둑으로만 기억하게 하고 싶진 않은데. 겨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 아이 옆에 섰다. 



“엄마, 강아지들 일어났을까? 가 봐도 돼?”


비가 온다고, 씻고 아침이라도 먹고 가 보자고 말려 봤지만 소용이 없다. 그래그래. 인사라도 하고 와.

아이를 보고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던 전등이와 마니가 망, 망망 짖는다. 반가워. 잘 잤니? 우리 좀 내보내 주지 않을래? 짖는 소리에서 사람 말이 들리는 것 같아서 혼자 웃었다. 


파란 우산을 쓰고 이리저리 발장난을 하고 물을 찰박거리고 물까치를 쫓아다니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마음이 그득해진다. 이런 아름다운 아침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좋은 곳에 딱 알맞은 어여쁜 책방을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감사 인사가 책방지기 마음에 가 닿았으려나.      


“엄마, 여기 정말 좋다. 강아지도 두 마리나 있고! 다음에 또 오자.”


책방을 나와 강화 갯벌로 향했다. 바닷가로 뛰어가다 말고 아이가 외친다. 그래그래, 또 오자. 꼭 그러자.                

* 책방 시점

인천 강화군 길상면 마니산로 101-16 

0507-1480-0301



#북스테이 #아이와여행 #책방여행 #강화책방 #책방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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