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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un 09. 2021

그곳에 서점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_ 괴산 <숲속작은책방>에서 보낸 동화 같은 하룻밤

                        

아침 안개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안개를 헤치고 산책을 하면서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날아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산안개가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부지런한 동네 사람이 이른 아침 뭔가를 태운 덕분에 코 끝에 스미는 알싸한 연기 냄새조차 감미롭다. 이 또한 비일상이 주는 놀라움일 수 있겠지만 일단은 참 좋다. 여행객이 맞이하는 아침과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아침이 같을 순 없겠으나, 적어도 이 순간 괴산 미루마을 어귀에 서 있는 여행객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볍다. 


마당에는 뱁새인지 되새인지 모를 작은 새 무리가 오색버들 주위를 부지런히 재재재재 날아다니고, 안개 속에서 빗자루로 무장한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마을 청소가 있는 날이라 했다. 안개를 헤치고 저벅저벅, 이른 아침을 헤치고 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퍽이나 정겹다. 

여기 오길 참 잘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겪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도시를 떠나며 우리에겐 확고한 목표, 아니 꿈이 있었다. 책이 있는 마을을 만들고 책이 있는 집엣 사람들과 함께 책과 문화를 나누는 따뜻한 삶에 대한 꿈, 욕심내지 않는 소박한 삶을 살되, 책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생계를 유지하고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할 수 있는 자립경제에 대한 꿈.”(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23)     


<숲속작은책방>을 만든 백창화, 김병록 부부는 일산에서 사립 어린이도서관을 운영했던 분들이다. 아이를 데리고 공공도서관에 갔다가 마땅히 보여 줄 책이 없이 어린이책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2002년에는 도서관을 차리기에 이르렀다. 그 마음 손에 잡히듯이 알 것 같다. 내 아이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집에 들인 책들로 남의 아이들 마음까지 어루만져 주고 싶은 마음, 얼마나 아름다운 욕심인가. 부부는 아이를 대안 중학교에 보내고 강화에 있는 <산마을고등학교>에 보냈다. 세상 기준에 따르지 않고 길을 열어 간 두 분이 참 멋있다.     



“집주인이 살고 있는 집에 방 한 칸을 빌려 머무는 숙박의 경험, 그건 돈을 주고받는 거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친척 집, 친구 집에 놀러온 듯한 친밀감과 따뜻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인심 좋은 주인아주머니의 푸짐한 시골 밥상을 받아먹는 이 따뜻함은 여행의 기억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34)     


남프랑스 시골 농가에서 하룻밤을 보낸 따뜻한 기억은 <숲속작은책방>의 다락방을 손님들에게 내놓게 만들었다. 괴산에 집을 지을 때부터 2층 다락방은 아들 몫으로 두었는데, 어쩌다 집에 오는 아들 대신 손님들이 머무는 곳이 되었다.  

그 다락방에서 보낸 하룻밤 잠은 달았다. 새 소리 말고는 그 어떤 소음도 없는 고요한 방에서, 아침까지 한 번 뒤척이지도 않고 잔 것 같다. 


역시나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아이다. 계단을 총총 내려가더니 문부터 열었다. 1층 문 앞에서 고양이 나비와 공주는 밥 달라고, 문 열어 달라고 야옹거리는 중이다. 열어 준 문으로 들어온 고양이들은 제각각 맘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아이는 책방 한켠에 몸을 뻗은 고양이 공주 옆에 앉아 하염없이 쓰다듬는다. 어제 오후, 바깥으로 한참을 쏘다닌 두 고양이가 도깨비바늘을 털에 잔뜩 묻혀 나타난 걸 보고 속으로 생각했더랬다. 저 아이들은 날마다 얼마나 행복할까? 고양이 뒤를 쫓아다니며 덩달아 환하게 웃는 아이를 보며 미안해지는 마음을 애써 누르고 또 눌렀다. 이런 곳에서 살게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없는 이유는 백 가지도 넘겠지만, 사실 뭔가 결단할 때는 딱 한 가지 결정적인 이유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는 법이다. 아직은 기다려야 할 때라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아이의 다정한 손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김병록 선생이 손수 다 짰다는 책장으로 꾸며진 곳이라 그런가, 다른 책방에서 느끼지 못했던 다정한 기운이 더해진 느낌이다. 내키는 책 아무것이나 펼쳐들고 책을 읽는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이다.     

따뜻한 빵과 요거트로 준비된 정갈한 아침상을 앞에 두고 책방지기 백창화 선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취, 에취취!”

끝없이 기침을 하시기에 감기에 심하게 걸리셨나 걱정했더니, 그게 아니라 고양이 털 알러지 때문이라 했다. 엥? 그런데 고양이를 두 마리나 키운다고?


“나이 먹을수록 더 심해지네요. 그래도 어떡해요. 얘들을 내보낼 수도 없고.”


끝없이 재채기를 하면서도 고양이 돌봄을 멈추지 않는 마음, 재채기가 심해질 줄 알면서 털에 붙은 도깨비바늘을 일일이 손으로 떼어 주고 털을 골라 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책임감, 약을 먹으면서도 고양이들을 내보내는 선택지 같은 건 아예 생각지도 않는 마음,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고양이들을 진짜 식구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백창화 선생을 직접 뵌 것은 2019년 ‘호수공원작은도서관’에서 있었던 강연에서였지만 그전에 페이스북으로, 책으로 여러 번 만났던 분이라 꼭 잘 아는 분 같다. 우리집 가까운 정발산 근처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분들이라 꼭 이웃사촌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지역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책을 읽는 즐거움, 이웃들과 소통하며 교육문화 공동체를 꾸려 가는 기쁨을 누렸다 했다. “도서관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책을 사랑”했고, “도서관 운동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책과 함께 사는 삶”(유럽의 아날로그 책 공간, 324)을 꿈꾸었던 시기였다. 2010년에 일산에 어린이도서관이 세 곳 생기자 도시를 떠나 자연에서 책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어도 될 것 같았다. 그때가 40대 후반이었다 한다. 아이가 크고 나서 부부가 새로운 삶을 일구어 갈 시기가 되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기분 좋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두 분이 괴산에 내려오면서 맨 처음 꿈꾸었던 것은 도서관이었다. 여러 가지 악재가 겹쳐 도서관을 열지 못하고 작은 책방을 열게 되었다. 도서관을 열었어도 멋지게 꾸려 나갔을 테지만 지금의 작고 다정한 책방이 나는 좋다.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책을 통해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한다.”는 포부도 멋지고, 과도한 노동을 하지 않고, 1년에 한 번 책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일하겠다는 결심도 좋다. 너무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 삶이 망가지도록 내버려두는 것, 그 또한 자신의 삶에 무책임한 거라고 생각한다. 


책이 주인공인 책방으로 만들고 싶어서, 책이 조연으로 밀려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책방에서 차를 팔지 않겠다고 결심한 책방지기의 마음이 고맙다. “내가 좋아서 책을 사고, 책을 읽고, 그 책이 너무 좋아 주위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고, 그 책을 팔아 밥을 먹는다는 일”(163)이 비길 데 없는 행복이라 말하는 백창화 선생의 이 작고 따뜻한 책방이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러 주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은 책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한 페이지만을 계속 보는 것과 같다.”

(유럽의 아날로그 책 공간)     


2014년에 처음 문을 연 뒤,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를 펴내고 이 시골 책방이 불러일으킨 변화는 놀랍다. 2016년 한 해 동안만 이 책방을 찾아온 손님이 무려 5천 명, 괴산의 초등학교 아이들이 버스를 대절해 책방 구경을 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이 작은 책방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간다. 백창화 선생이 신문에 연재하는 책 소개를 보고 택시를 타고 와서 무작정 그 책을 달라 하는 할아버지도 있고, 먼 길 마다않고 일부러 이 곳을 찾아오는 단골들도 생겼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흔들어대는 도서정가제 개정 움직임에 상처받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손님이 현저히 줄어들고 예정된 행사도 다 취소되는 중에도 책방지기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책을 통해 세상을 여행하는 사람은 코로나에도 지지 않고, 굳건히 책과 함께 시간을 견뎌 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 나 여기서 살래.”


책방에 도착한 날 밤, 다락방에 누워서 자려다 말고 아이가 말했었다. 하루 만에 시골 책방과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이다. 나비와 공주를 신나게 쫓아다닌 기억, 아무리 뛰어다녀도 “안 돼!”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잔디 마당, 해먹에 누워 흔들흔들 시간을 보내도 “이제 그만!” 하는 사람 하나 없고, 피노키오가 반겨 주는 오두막 책방에 들어가 이 책 저 책 꺼내 봐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자유를 사랑하지 않을 어린이가 어디 있을까. 아이가 책을 좋아하게 만들고 싶으면 책만 자꾸 안겨 줄 것이 아니라 책에 대한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라고 한 백창화 선생의 말이 이만큼 딱 알맞게 실현된 곳도 드물 것 같다. 


“여긴 시골인데도 좋은 게 참 많다.”


그럼그럼. 엄마도 동의해. 도시는 좋은 곳, 시골은 뭔가 좀 많이 없는 곳, 이라 이미 나름대로 도식화하고 있는 것 같아 그 점은 조심스럽지만 막상 와 보고 “어, 겨우 이거 보러 여기까지 온 거야? 교보문고가 훨씬 더 좋다 뭐.” 하는 아이들도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 이 작은 시골 책방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느끼고 실감한 아이의 감상이 일단은 반갑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이는 한동안 동네에서 고양이를 만날 때마다, “숲속책방 고양이는 도깨비바늘 달고 다녔지.” “고양이들은 어두운 데를 참 좋아하더라.” “나비랑 공주랑 있었어.” 하는 소리를 계속했다. 남편은 책방 옆에 새로 생긴 자연드림파크에서 돌에 구워 먹은 김치 삼겹살 얘기를 여러 번 했다. 종류는 다르지만, 아이도 아이 아빠도 만족한 여행이었으니 그걸로 됐다.          

     

“엄마, 엄마는 어떤 음식 좋아해?”

“(갑자기 웬 음식?) 음, 칼국수도 좋아하고 떡도 좋아하고, 또 쑥버무리가 인생 음식이고, 보자, 또 뭐가 있나?”

차를 타고 어딘가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아이가 갑자기 물어서 더듬더듬 대답을 했다. 내가 대답하는 동안 아이가 앞에 있는 의자 머리받침 부분을 올렸다 내렸다 딸깍 딸깍 소리를 낸다. 

“그거 뭐 하는 거야?”

“응, 엄마가 말한 거 지금 저장 중이야.”

“저장?”

“응. 내 머릿속에는 숲속책방이 들어 있거든.”


아이가 하는 말을 종합해 보자면, 자기 머릿속에 든 ‘숲속책방’은 일종의 컴퓨터 같은 건데 엄마가 노트북 두드리는 것처럼 그렇게 의자로 딸깍딸깍 소리를 내면 내용이 그대로 저장된다는 거였다. 여섯 살 평생, 가장 마음에 드는 공간을 만났고 살고 싶은 책방을 갖게 된 아이는 제가 아는 가장 똑똑한 공간인 ‘숲속책방’을 그런 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책과 함께한 좋은 추억을 갖게 해 주는 것, 아이에게 그것만큼 좋은 선물도 없다는 사실. 


아이에게 최고의 책방 리스트가 계속해서 업데이트될 수 있도록 여기저기, 더 많이 다니고 싶다.       

    


* 괴산 숲속책방

충북 괴산군 칠성면 명태재로미루길90 미루마을 28호

043-834-7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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