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을 파리로 갔다. 모든 것이 좋았지만, 책방 <셰익스피어&컴퍼니>를 찾아갔던 순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유명세 때문인지 쇼핑몰보다 더 빽빽한 사람들을 뚫고 책방을 둘러보게 되는 상황도 낯설었지만, 당연한 듯 책방에서의 하룻밤을 누리는 배낭 여행객(이라고 쓰긴 하지만 노숙자에 가까운 사람들)의 당당한 태도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온갖 낙서로 어지러운 책방 벽도 신선한 충격이었고, 그런 풍경을 여상스레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도 나로서는 놀라웠다. 센강에 가득 늘어선 헌책 수레들을 보고 와서인지 사람들이 마구 건드리는 책방 책들이 모두 헌 책인 것만 같았다. 헌책과 새 책의 구분이 안 되게 진열해 둔 때문인지, 아니면 낡고 오래된 건물 때문인지 어딘지 현실성이 2퍼센트쯤 결여된 그 서점의 매력은 헤밍웨이의 파리 시절 기록을 통해 좀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무렵, 무척 가난했던 나는 오데옹 거리 12번지에 있는 실비아 비치의 대여점 셰익스피어&컴퍼니에서 책을 빌리곤 했다. 겨울이 되면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쌀쌀한 거리에 있는 그 서점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입구에 커다란 난로를 피워 놓았다. 따뜻하고, 쾌적하고, 멋진 곳이었다. 실내에는 탁자들이 놓여 있고, 선반에는 책들이 가득 차 있었으며, 유리 진열장에는 신간 서적들을 전시해 놓았다. 벽에는 생존해 있거나 이미 작고한 유명한 작가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파리는 날마다 축제, 32)
내가 갔던 서점은 가난했던 헤밍웨이에게 무상으로 책을 빌려 주었던 바로 그 서점은 아니다. 당시 <셰익스피어&컴퍼니>의 대표였던 실비아 비치는 작가들에게 보증금은 언제든 돈이 생길 때 내면 된다고 했고, 원하는 책이 있으면 얼마든지 빌려 가라고 했다. 1921년에 문을 연 이 영문학 전문 서점은 당시 파리에 있던 작가들의 사랑방이었으며, 영국과 미국에서 출판 금지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초판본을 펴낸 곳이기도 했다. 영화 <비포선셋>에서 두 사람이 9년 만에 만나는 장소로 촬영되어 유명해진 그 서점은 1962년에 실비아가 사망한 뒤 조지 휘트먼이 노트르담 대성당 건너편에 같은 이름으로 새로 연 곳이다. 파리에서 노숙자가 될 뻔한 많은 사람들을 재워 준 곳으로 유명하며,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꿈의 공간이 되어 주었으며, 전 세계 여행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책방이다.
책만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머물 곳까지 제공해 주는 이 서점의 정신은 멀리 중국에까지 퍼져 나가기에 이르렀으니, 류얼시는 <셰익스피어&컴퍼니>의 영감을 얻어 중국 광저우에 24시간 서점 <1200북숍>을 열었다.
“가출한 아이, 매일 밤 신문을 보며 손톱을 다듬는 아주머니, 밤새 외국어를 공부하는 할아버지, 자기 몸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지만 가족에게 신세 지고 싶어하지 않는 아가씨, 여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광저우를 떠나 본 적이 없는 배낭족…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우리 24시간 서점에서 밤을 보낼 수 있느냐고 묻곤 한다. 모두들 뭐라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이 도시의 기인이다. (…) 나는 우리 24시간 서점이 밤에 오갈 데 없는 이들의 쉴 곳이 되기를 바란다. 책을 보든 안 보든, 돈을 쓰든 안 쓰든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만 끼치지 않으면 그들이 이 도시에 머무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서점의 온도, 115)
무료 독서 공간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소파방을 열어 밤새 그곳에서 사람들이 머물 수 있도록 돕는 책방 주인의 마음이라니. 줄잡아 수만 명이 이 책방이 있어서 추운 바깥에서 떨지 않을 수 있었다. 천국은 아마도 책방의 모습일 거라던 보르헤스의 말은 적어도 파리의 <셰익스피어&컴퍼니>와 광저우의 <1200북숍>에서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시드니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도 틈만 나면 책방에 놀러 갔다. 친구네 집에서 10분쯤 걸어가면 크지도 작지도 않은 2층 책방이 하나 있었는데, 서점에 붙여 놓은 온갖 포스트잇이 그곳이 지역 사람들에게 어떤 공간인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책방에서 여는 낭독회나 강연에 동네 사람들이 슬렁슬렁 걸어서 편하게 참석하는 모습은 말할 수 없이 부러운 장면이었다. 크게 이름난 책방이 아닌데도, 오랫동안 그곳에 자리 잡고 사람들 속에 스며든 곳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우리에게도 그런 다정한 동네 책방들이 꽤 많이 생겼으나, 그때만 해도 서점 하면 오로지 대형 서점 아니면 문구점과 겸한 참고서 책방, 정도의 느낌이 강했던 때라 꽤나 그 모습이 부러웠다. 동네 책방으로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가거나, 동네 책방에 작가를 만나러 가는 것이 가능해졌으니, 이제 마냥 부럽지만은 않은 일이지. 새삼스럽지만, 이런 일이 가능하게 해 준 도서정가제 만세다.
그러나 여전히 탐나는 것 하나는 식물원마다에 딸려 있던 식물 전문 서점들의 존재다. 브리즈번에서, 시드니에서, 꽤 여러 곳의 식물원에 다녀왔는데 그때마다 가방 가득 책과 기념품을 넣어 왔다. 원주민들의 예술 작품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해 둔 것도 좋았고, 온갖 식물 책들, 텃밭 가꾸는 법에 관한 책과 집에 식물을 들여놓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 정원 디자인에 관한 수십 종의 책들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침고요수목원, 한택식물원, 천리포식물원, 제주의 여미지식물원 같은 이름난 곳들 다녀봤지만 어디에서도 그런 전문적인 큐레이션이 가미된 책방은 만나지 못했다. 간단한 기념 엽서, 해당 식물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책들만 팔고 있었다. 그것도 향수나 향초 같은 상품들 곁에 겨우 구색 맞춘 느낌으로만. 아름다운 세밀화로 꾸민 패브릭 상품이나 포스터, 멋진 액자, 갖고 싶은 식물 도감, 식물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 같은 것을 잘 갖추어 놓은 식물원 서점을 만나고 싶다.
도쿄 여행 때도 서점 중심으로 동선을 짰다. 1891년에 처음 문을 열어 5대째 이어 오고 있는 <산요도서점>에 들렀다가 그림책 전문 책방인 <크레용하우스>에 가고, <키노쿠니야>에 가서 그 유명한 엘리베이터 걸이 실재한다는 데 놀라고 <츠타야 서점>에 가서 “물건이 아니라 가치를 판”다는 경영 철학을 눈으로 확인하고 오자는 식이었다.
오래전 베이징에 갔을 때는 출장이었던지라 자유롭게 여기저기 다니지는 못했지만,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작업한 직후였던지라 유리창의 고서점들 여기저기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우리보다 출판 환경은 많이 뒤져 보이지만 우리에게 없는 독특한 책들도 꽤 많아서 병풍처럼 펼쳐지는 농사일기 그림책을 여러 권 사 왔던 기억이 새롭다.
외국의 도시를 떠올리면 그곳에서 들렀던 서점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여행에 들고 갔던 책을 먼저 떠올리는 나 같은 사람은 책방이 없는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게 상상이 잘 안 된다.(남극이나 북극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곳에 서점이 있어서 여행이 윤택해질 수 있었다. 연남동과 제주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마음이 아마 이렇지 않을까. 코로나가 지나고 여행이 다시 우리의 일상이 되었을 때, 가고 싶은 곳들을 점찍으며 이 시기를 슬기롭게 움츠렸다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