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비 Jun 30. 2021

그해 5월, 제주의 책방들

                        


아이가 여섯 살 때, 제주 전통 가옥을 개조한 조천의 한 가옥에서 3주를 머물다 왔다. 아이 아빠가 주말에 다녀가기도 하고, 퇴직한 큰언니가 옳다구나 여행을 오기도 했으며, 엄마랑 아버지가 며칠 다녀가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아이와 나 둘이서 시간을 보냈다. 볕 좋은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아 나는 책을 보고, 아이는 레고를 조립했다. 평화롭고 아늑한,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다섯 살까지만 해도 꿈꾸지 못했던 여행이었다. 아이 손이 제법 여물어 혼자서도 레고를 곧잘 조립했고, 엄마에게도 엄마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오래도록 이야기한 덕분이었다. 아이는 잠깐씩 엄마를 내버려두고 저 혼자 바다를 구경하고, 조개를 줍다가도, 마당의 화초들에 물을 주다가도, “심심해. 그래도 괜찮아.” “엄마,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하지?” 묻곤 했다. 그러다 저녁이 되어 아빠랑 통화할 때는 짐짓 자랑스럽게 “응, 오늘도 엄마 책 보라고 내가 시간 줬어.” 말하곤 했다. 


그리고 사람이 그립거나, 어딘가 다녀오고 싶을 때는 책방에 다녀왔다. 가까운 곳만 걸어서 다니려고 차를 빌리지 않아서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서점 <보배책방>으로 나들이를 갔다. 아는 편집자 언니가 마음에 들 거라고, 꼭 한번 들러 보라 했던 곳인데 왜 내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할 거라 생각했는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책방 앞으로는 너른 연못이, 책방 뒤로는 푸른 밭이 펼쳐져 있고, 전깃줄마다 도시에선 행방이 묘연해진 제비들이 봄이라고 지지배배 우짖는 곳이었다.(얼마 안 가 책방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들었는데, 새로 이사한 곳도 모르긴 몰라도 작고 다정한 공간일 것이라 짐작한다.)


서울에서 편집자 생활을 하다 제주로 내려가 책방을 열었다는 책방지기 정보배 님. 마침 초등학교에 다니는 책방지기의 딸이 책방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집이 책방이라니, 너는 정말 좋겠다. 소리가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지만 겨우 참았다. 아이는 아닐 수도 있는데, 어른들이 괜히 이런저런 말을 하는 건 싫을 것 같았다. 누나랑 놀고 싶어서 주변을 뱅뱅 돌던 내 아이는 누나가 집으로 가자 괜히 심통을 부리며 “우리도 집에 가자” 떼를 쓰기 시작했다. 책 한 권 골라 보라 했더니 심통난 남자 아이의 화난 얼굴로 가득찬 이토 히데오의 그림책 《친구랑 싸웠어!》를 집어든다. 같이 놀 어린이가 없는 제주살이가 어른과는 달리 별로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이런 순간에 느낀다. 


어느 책에선가 보니, 제주 읍면 단위 초등학교서 이주민의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 했다. 책방지기의 딸이 다니는 더럭초등학교도 분교였다가 전학생이 늘어 초등학교로 승격되었다 했다. 늘어난 아이 대부분이 이주민의 아이들. 제주에 깃든 지 이십 년 가까이 되는 혜영 언니는 마을 어르신들이 어렸을 때 돌을 나르고 나무를 심어 만든 학교가 문을 닫지 않고 계속 아이들 소리로 가득 차는 건 좋은데, 1년 혹은 2년쯤 머물다 떠나는 아이들과 머물러야 하는 아이들 사이에 생겨나는 미묘한 갈등이 없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아이들만 그렇겠는가. 아빠는 뭍에서 일을 하고, 엄마와 아이만 이주해 들어간 집들도 꽤 되고, 언제든 다시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 붙박이로 살아가는 아이들과 조금씩 삐걱대기도 한댔다. 그래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투명하고 밝게 행복하지만, 결국 문제는 언제나 어른들. 옮겨 심은 나무들이 땅앓이를 하듯이, 마음까지 제대로 이주하지 못한 사람들이 불러일으키는 긴장은 때로 독이 되기도 할 것 같다.      


한림읍에 있는 <달리책방>은 <보배책방>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보배책방>이 아이들도 맘껏 둘러볼 수 있는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뭔가 어른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책방이랄까. 책방지기가 들어오는 손님에게 책방 이용법을 조근조근 속삭여 주는 것부터가 그렇다. 


음료를 사면 헌 책 코너에 있는 책을 들고 앉아서 읽을 수 있는데, 헌 책에는 정갈한 소개글이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책방지기의 리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새 책을 사면 책방에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다. 제주 책방에 들르는 사람들이 대부분 관광객이고, 그 사람들이 책방을 여느 관광지와 똑같이 생각하면서 그저 사진만 찍고 화장실만 이용하고 나가는 경우가 많아져 생긴 조건들이다. 이곳은 책방이니 반드시 책을 한 권 사 달라, 그렇지 않으면 사진도 자제 부탁드린다, 이런 문구를 보고 볼멘소릴 내는 사람들이 있는 줄 안다. 그 책방이 아름답고 보기 좋다면 그곳을 그렇게 가꾸고 보듬는 책방지기들의 노동 가치를 책 한 권 사는 것으로 격려하는 것이 마땅한 일임을 모두가 동의해 주었으면 좋겠다. 


<달리책방>은 꽤나 넓다. 그 넓은 책방에 손님은 우리 말고 둘뿐이었다. 창가 소파에 앉아 까무룩 낮잠에 빠진 초로의 신사, 그리고 그 옆에서 사르락 사르락 책장을 넘기는 여인의 뒷모습이 다정하다. 같은 곳에 있지만 각자의 시간을 즐기는 두 사람, 저런 여백이 참 좋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되, 따로인 존재를 마음껏 인정하는 여유라니. 


무레 요코의 소설 한 권, 제주에 다녀간 이야기들로 독립 출간한 《탐라일기 1, 2》를 사 들고 나왔다. 너무 조용한 분위기라 입도 뻥긋 못 하게 했더니, 책방을 나서자마자 “말도 못 하고, 아, 힘들었다.” 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느라 애 좀 썼다.               


바닷가 가까운 곳에 있는 책방 <북스토어 아베끄>는 제주 전통 가옥을 개조해 만들었다. 북스테이를 겸하고 있었는데, 안거리와 밖거리로 구분된 제주 주택 구조 그대로 하나는 책방으로, 하나는 북스테이로 쓰고 있었다. 책방을 지키는 강아지 한 마리가 깁스를 하고 절뚝거리고 다니는 게 안쓰러웠는지, 아이는 내내 밖에서 강아지만 쫓아다닌다. 

“귀찮게 하면 안 돼. 가뜩이나 몸도 불편해 보이는데.”

“귀찮게 안 해. 놀아 주는 거야.”

말려도 소용없다. 그저 꼬리나 잡아당기지 말라고 조심시킬 수밖에. 책방지기가 아이는 걱정 말고 들어가 책을 보라 한다. 감사해라. 


창문에서 건너다보이는 풍경이 일품이다. 사진 찍으려면 반드시 책을 사라고 간곡하게 적어 둔 메모가 이해되고도 남는다. 이런 풍경, 이런 분위기를 담으면서 공짜이기를 바라면 안 되지, 암만. 

우리 집 책꽂이와 겹치는 책들이 꽤 되고, 페이스북 친구들의 책들도 꽤 많다. 취향이 겹치는 곳이다. 작은 책방일수록 책방지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선적으로 가치를 두는 것이 무엇인지 잘 드러난다. 대개는 책방지기가 좋아하는 책을 앞쪽에 두게 되고, 손님들이 그걸 먼저 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는 것이 당연하니까. 말하지 않아도 ‘이건 정말 좋은 책이에요. 데려가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이곳에서도 몇 권의 책을 챙겨 돌아왔다. 책방에서 줄 수 있는 모든 기념품을 챙겨 주신 책방지기 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제주에서 보낸 모든 날들이 좋았지만, 작고 아담한 책방으로 살방살방 나들이 다녀오던 순간들이 특별히 빛났다. 코로나로 관광객이 급격이 줄어든 제주의 책방들이 무사히 이 시기를 건너 다시 만나게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작가의 이전글 그곳에 책방이 있어서 다행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