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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an 09. 2023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병든 밤, 누구도 아프지 않기를 2


일요일, 서울역에 아이와 함께 아버지 마중을 나갔다. 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병원을 오가게 되는 이 상황이 아이는 놀이 같은가 보다. 잔뜩 신이 나서 뛰어다니네. 신촌 원룸엘 가 보더니, 이제 여기가 외갓집이냐 묻는다. 가지 않겠다는 아이를 제 아빠와 함께 돌려보내고 나는 언니와 함께 아버지 곁을 지킨다. 아침 일찍 병원으로 움직여야 하는 일정이 부담스러워 일찌감치 불을 끄고 눕는다.      


피를 뽑고, 의사를 만나고, 주사를 맞으러 들어가기까지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대기실 가득한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시간을 버틴다. 한여름에 담요를 두른 저이는 온몸에 한기가 든 모양이네, 혼자 중얼대는 줄 알았더니 귀에 뭘 끼고 있구나, 가 봐라 내 이름 떴는가. 아버지 역시 할 말이 많으시다. 전라도에서 경상도에서 더 멀리 제주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억양과 각기 다른 말투로 암을 이야기한다. 서로의 안위를 당부한다. 너무도 멀쩡해 보여서 보호자인 줄 알았던 이가 이름 불려 들어가는 걸 보면서는 나도 모르게 안타까워하고, 휠체어를 탄 아이가 울며 지나가는 모습에 심장이 조여든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남이지만 또 모두가 같은 처지라 쉽게 벽이 허물어진다. 카프카는 “인생이라는 화마를 잡기 위한 맞불”이 문학이랬는데, 이곳에서 암이라는 화마를 잡는 것은 같은 처지에 있는 누군가의 진득한 다크서클 혹은 움푹한 볼우물쯤 되는 것 같다.      


주사 이틀째. 비가 내린 덕에 산책을 시도해 볼 수 있었다. 항암 주사를 맞는 동안은 자외선을 쬐는 것이 위험하다 하니 모자도 쓰시고, 양산도 씌워 드리고, 어떻게든 그늘을 찾아 다녀야 한다. 이럴 땐 더위보다 추위가 낫다 싶지만, 막상 겨울이 되면 또 어떨지 모를 일이다.      


한강 주차장에서 선유도까지 걸어가다 보니, 아버지와 소풍이라도 가는 기분이다. 오래전, 엄마도 아버지도 건강하시던 때 이곳에 와서 사진도 찍었지 않느냐 여쭤 봐도 “나는 여기 처음인데?” 하신다. 그렇게 총기 좋으시던 아버지의 기억도 예전과는 다르다. 엄마만 늙는 게 아니라 아버지도 늙고 계셨는데, 암으로 휘청하시기 전까지는 실감을 못 했다.      


10시에 연다던 선유도 카페가 문을 열지 않아, 그 옆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십 분 정도밖에 걷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숨이 차다. 사람에게 길들여진 참새들이 발치에 와서 콕콕댄다. 뭐라도 주고 싶지만 줄 게 없네. 미안. 참새들이 오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화장실에 가서 한참을 앉아 계시다 나왔다. 볼일 보는 일이 이렇게 힘들어지실 때까지 몰랐다니. 안타까운 후회는 수신인 없는 편지처럼 소용 없는 감정이다.      

한강이 순식간에 불어나 올 때 걸어왔던 강변길이 물속에 잠겼다. 부지불식, 이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거겠지. 아버지의 암덩어리가 대장에서 소리없이 크기를 키우는 동안 나는 내 아이를 키우고, 나의 삶을 일구고, 내 일상을 사느라 그 변화를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가 벌써 몇 달 전에 치질 때문에 불편하다 하셨는데, 그 말이 근거 없는 아버지의 자가진단이었단 걸 알아채기까지 너무 오래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 시간이 사무쳐서, 자꾸만 내 발에 내가 넘어질 것처럼 휘청인다.      


“그래도 나오니 좋구나. 물구경, 자알 했다.”      


햇살 아래 드러난 아버지의 검버섯은 도드라지고 확연했다. 한강에서 유람선을 타자 했던 약속은 이번에도 실행되지 못했다. 지키지 못하는 약속들이 언젠가, 그 어느 날엔가 내 무릎을 꺾이게 만드는 날들이 오고야 말겠지. 그래도 지금 오늘은, 저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 힘껏 웃었던 찰나의 안간힘으로 버텨 내어야 하리라. 


2022년 8월 2일의 기록     


* 제목은 박준의 시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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