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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Mar 20. 2024

숨겨진 환자, 제2의 희생자



새벽에는 제법 바람이 차다. 자꾸만 뒤채는 아이의 이불을 여며 주고, 화장실에서 어머니와 씨름 중인 남편의 마른 등을 쓸어 준다. 새벽 2시에 소변 때문에 이미 이불을 한 차례 버렸는데, 그뒤로 계속 10분에 한 번씩 일어나 화장실에 앉아 있다 나오시는 중이라 했다. 옷을 내리고, 볼일은 보지 않고, 다시 옷을 입고 방으로 돌아오신다. 왜? 라는 질문이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여쭤 보면 “나 오줌 누고 왔잖아.” 하시는 어머니. “볼일 안 보셨는데요, 어머니.” 하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눈으로 사납게 나를 보신다. “어머니, 자꾸 그러시면 아들이 잠을 못 자요. 이제 화장실 그만 다니시고, 주무세요.” 하면, “그래.” 하고는 돌아누워 손바닥에 침을 탁 뱉어 이불에 슥슥 문지르는 어머니. 


가을 벌레가 찌르르 째르르 하는 새벽, 남편의 담뱃불이 주차장 저만치에서 빨갛게 타오른다. 위로할 길 없는 깊은 절망. “우리 엄마가 이상해.” 하며 남편이 울먹이던 그날로부터 벌써 몇 번의 계절이 지났는지. 앞으로 우리는 몇 개의 계절을 더 견딜 수 있을까.      


7시에 추석 기차 예매 창을 열고, 4870번째 대기자가 되어 30분을 기다린 끝에 겨우 예매에 성공했다. 추석 때 식구들이 모이면 그냥 많이 웃기만 했으면 좋겠다. 엄마의 금 간 갈비뼈는 그때쯤 다 나아 주면 좋으련만. 밤마다 ‘어매’를 부르며 우는 엄마의 계절은 이제 몇 개나 남았을까.  


                                                                                     - 2023년 8월 30일의 일기 중에서           




“중앙치매센터” 홈페이지를 열면 첫 화면에 ‘치매 오늘은’이라는 배너가 보인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2020년 기준) 8,134,674.5명 중 786,184명(2019년)이 치매 환자란다. 10%가 넘는 수치다. 65세 이상 인구 열 명 중 한 명은 치매란 이야기. 78만 명이 넘는 치매 환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일상이 어떠한지, 나는 알지 못했다. 2021년 83세 친정엄마가 치매 판정을 받고, 2022년 82세 된 시어머니가 치매 판정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쌓여 1년이 넘어서자, 겨우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 혼자 겪는 일이 아닐 텐데, 다른 사람들은 이 시간을 어떻게 채우고 있는 걸까? 돌봄에 치여 자신을 잃어 가고 있지나 않을까? 씩씩하고 명랑하게 지내는 사람도 분명히 있겠지? 다른 사람들은 잘만 견디는데 아무래도 나는 문제인 것 같다, 는 시간들을 오락가락 건너고 있다. 


어머니를 집으로 모신 지 3개월 만에 남편은 대상포진에 걸렸다. 어머니 곁에서 잠을 자기 시작하면서 통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 2시, 4시, 6시에 벌떡벌떡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어머니가 던진 변과 오줌 실수로 엉망이 되곤 했다. 완치되지 않는 병 치매, 노력해도 나아질 수 없는 대상을 옆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주 돌봄자를 일컬어 “숨겨진 환자(dden Pabier)”, “제2의 회생자(Hicden victm)”라 부르는 것도 당연하다 싶다. 육체적 피로가 누적되는 동안 마음의 피로 또한 착실히 쌓여 가고, 변 실수를 한 어머니를 씻기려는 아들에게 이리저리 팔을 휘두르던 어머니가 욕실 벽에 머리를 찧거나 하는 사고라도 생긴 날에는 자신을 향한 분노와 절망 때문에 남편의 평상심은 극도로 흔들린다. 


함께 지낸 지 6개월쯤 됐을 때였다. 아이가 책방에서 사 온 그림책 <호랭떡집>에 딸린 보드게임으로 할머니와 함께 신나는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윷놀이와 비슷하지만, 게임 중간에 “떡 카드 한 장 반납” “1칸 뒤로” “떡 카드 한 장 받기” 같은 것들이 있고 “1회 휴식” “다시 지옥으로” 같은 벌칙들이 있어 재미있게 놀았다. 그중에 단연 “노래 부르기” 벌칙이 인기였는데, 아빠든 엄마든 아이든 할머니든 누구라도 걸리면 보는 사람은 즐거운 상황이어서 다들 오랜만에 즐겁게 웃을 수 있었다. 마침 그 벌칙에 딱 걸린 어머니가 “두만강 푸른물에~” 노래를 아들과 정겹게 부르시는 장면은 보기에 몹시 좋았다. 환하게 웃으며 노래를 부르던 어머니는 습관대로 침을 바닥에 뱉어 버렸고, 여기저기 침 뱉어 바르는 걸 못 견뎌했던 남편이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그 저녁의 안온함은 끝나 버렸다. 


중앙치매센터에서는 “환자를 돌보면서 생기는 화 짜중. 분노, 절망스러운 감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말한다. “장기간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은 환자 상태가 호전되면 기분이 나아졌다 악화되면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게” 된다고. 그러면서 “이러한 감정이 생길 때 분노일지 등을 기록해 어떤 상황에서 이런 감정이 생기는 것인지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극히 한가한 소리다. 어머니를 향한 분노, 편찮으신 어머니를 향해 화를 내는 자신에 대한 혐오, 어린 아들에게 보이기 싫은 모습을 보이게 되는 상황에서 오는 죄책감, 사적인 약속들을 뒤로 미루면서 오는 우울감, 애쓰는 아내를 향한 미안함 같은 마음들이 뒤엉켜 불안한 일상이 이어진다.


시어머니에 앞서 친정엄마의 인지장애를 눈으로 확인한 나는 좀 덜했던가? 어머니를 우리집으로 모시기 한 달 전, 대구에 계신 엄마를 모시고 와 일주일을 보냈다. 그전에도 조금씩 엄마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집에 편하게 오가실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혼자 오실 수가 없어서 내가 대구에 내려가 엄마를 모시고 왔다. 아이가 어릴 때와 똑같은 준비물이 필요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일회용 팬티, 언제 어디에서라도 편하게 갈아입을 수 있는 옷들, 엄마 혼자 떨어졌을 경우를 대비해 전화기를 주머니에 잘 챙기셨나 확인. 그리고 수시로 목이 마른지, 화장실에 가고 싶은지 물어야 했다. 이미 많은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 엄마의 머릿속이 궁금하고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조금은 더 괜찮다고만 믿고 싶었다. 


엄마는 두 계절 전보다 더 많이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고 싶어하지 않았고, 밥상 앞에 앉아도 입을 꼭 다물고 먹으려 하지 않았다. 고구마나 체리는 반가워하셨지만 밥이나 고기는 도리질을 했다. 달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가방에 옷을 주섬주섬 싸고는 집에 가겠다 나서곤 했다. 볼일 보러 들어가선 화장실에 속옷을 벗어 두고 나오시기도 했고, 식사하시라 부르면 잠깐 막내딸을 잊고 “예” 대답하기도 하셨다. 코로나로 자주 뵙지 못했던 시간들이 한없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래도 엄마는 우리집 고양이 도토리랑 장난도 치면서 많이 웃었고, 호수공원을 걸으면서 참 좋구나, 감탄도 하시며 지금 현재의 시간을 붙들고 계셔 주셨다, 감사하게도. 


그러나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에 이미 엄마는 많이 힘들어진 상태였다. 엄마를 모시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을 때였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 뷔페에 모셨는데, 이것저것 골고루 맛있게 드시는던 엄마 표정이 이상해졌다. 


“화장실이 어데고?”


멀지 않은 그 길이 천릿길처럼 느껴졌다. 다리가 불편해 빨리 걷지 못하는 엄마를 부축해 화장실까지 무사히 가긴 갔는데, 변기에 앉아 바지를 내리는 순간 실수를 하셨고, 속옷과 바지를 버리고 말았다. 팬티를 벗겨 드리고 뒷수습을 하는데, 처음 겪는 일 앞에서 나는 그만 엉엉 울고만 싶어졌다. 정신을 꼭 붙들고, 태연한 척 보이려 애쓰는 나를 엄마는 곤란한 얼굴로 바라보고 계셨다.      


시어머니 역시 코로나 이후 고립된 생활이 지속되면서 급격히 자신을 잃었다. 같이 지내는 막내아들이 출근하고 혼자 있던 어느 아침, 집을 나가서 다시 집을 찾아오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나빠져 버릴 수 있는지, 놀랍고 황망했다. 그날로 짐을 옮겨 온 어머니와 4년 만에 다시 함께 생활하게 됐다. 결혼해 아이를 낳기까지 5년, 그리고 그 아이가 4살이 되었을 때 분가를 했으니 꽤 오랜 시간 함께 보낸 사이임에도 역시, 시어머니와 일상을 함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인지 장애를 겪는 82세 시어머니라면 더. 


완두콩 껍질을 벗기는 내 옆에 와 도와주시려 하다가는 “이거, 먹어도 되는 거지?” 하시며 말릴 새도 없이 날콩을 입에 쏙 넣으시는가 하면 식사 준비 다 해 놓고 남편도 돌아와 있는 상태여서 볼일 보러 나갔다 오겠다 하면 “밥은?”이라며 눈을 사납게 뜨시기도 했고, 마늘을 까는 내 옆에 오셔서는 기어코 손톱으로 마늘마다 생채기를 내놓으시기고, 그 매운 걸 또 입에 쏙 넣기도 하셨다. 변기에다 손을 씻으시는가 하면, 30초에 한 번씩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려 하셨다. 금방 화장실 다녀오셨다 말씀드리면 “내가 언제?”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셨다. 


어머니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드셔서 그랬다는 걸,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나 역시 모든 것이 놀랍기만 했다. 치매 진단을 받고 집 근처 주간보호센터를 알아보는 두 달 동안 내가 산후 조리할 때처럼 어머니와 나는 내내 붙어 있었다. 잠깐씩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기도 했고, 텔레비전도 같이 보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이미자의 노래도 함께 들었다. 


“지금 가족을 돌보고 있는 분들에게도 이 ‘객관적으로 보는’ 방법을 추천한다. 카메라를 들고 보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기분으로, 간병으로 꽉 막힌 기분은 싹 덜어내고 객관적인 시점으로 바라보면 분명 관점이 크게 바뀐다.”


85세 어머니의 치매를 영상으로 담았던 딸 노부토모 나오코는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당부한다. 거리두기가 저자의 말처럼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는 영상보다는 글이 편해서 가끔 끄적끄적 내 감정을 남겨 두었는데, 그렇게 쓰다 보면 들끓던 마음이 다소 가라앉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때 쓴 글들을 지금 읽으면 푸훗,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한다. 채플린이 그랬다. 인생,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어머니 전화기가 울렸다. 얼마 전에 요양원에 가신 이모님이다. 이모부님 돌아가시고 혼자 지내기 힘드셔서 요양원으로 옮기셨다. 어머니가 어느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모르시는 듯해서 통화 버튼을 대신 눌러 드렸다. 


“이~ 나여.”


저편에서 이모님이 뭐라 하시자, 어머니는 “나는 전화 안 했지.” 그러신다. 


또 이모님이 뭐라 하시고, “이, 나는 전화 안 했어.” 또 그러시고, 저쪽에서 이모님이 또 “언니가 전화했으니까 번호가 남았고, 그거 보고 전화를 한 거”라고 한참 얘기하니 어머니는 또 “내가 전화 안 했다니까!” 같은 말을 반복하신다. 스피커폰으로 돌리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대화가 열 번쯤 오간다. 할 수 없이 내가 전화를 바꿔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잠시 후, 또 걸려온 전화. 이모님이다. 어머니는 또 “이~ 나여.” 하시고, 이모님은 또 “언니가 전화해서 내가 전화했지.” 하시고, 그러면 어머니는 또 “전화 안 했는데?” 처음처럼 놀라시고, 이모님은 “언니가 전화했다니까.”를 반복한다. 도돌이표로 끝없이 계속되는 대화. 이런 것도 대화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전화기를 들고 이것저것 자꾸 꾹꾹 눌러보는 어머니. 결국 최근 통화에 이름이 남아 있는 이모님께 다시 전화. 신호가 가자 화들짝 놀라 전화를 끊어버리는 어머니. 잠시 후 다시 울리는 전화. 


“이~ 나여. 왜?”     




이런 일기를 쓴 날, 내 머릿속에는 ‘저 전화기를 감춰야겠다’, 하는 생각과 ‘그래도 될까?’ 하는 생각이 같은 크기로 싸우고 있었다. 인지장애를 겪는 어르신들은 당신이 같은 내용을 자꾸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본인이 말한 것을 잊어버리고 처음 물어본다고 믿는 것이다. 듣는 사람은 미칠 지경이다. 몇 번이고 대답을 하다가 다섯 번을 넘어가면 그만 짜증이 치솟는다. <치매라고 두려워 마라> 책을 보니 “외로움과 불안, 중요한 일을 잊고 있다는 생각, 떠올리지 못하는 불쾌함으로 인해” 같은 질문을 자꾸만 하는 거란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고. 요양원에 계시는 이모님도, 이제 막 치매 진단을 받고 마음이 불안한 어머니도 똑같이 불안한 상태로 서로를 대하니 말이 이어지질 않는다. 


어머니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갔어?” 막내아들이 어디 갔느냐고, 20초마다 한 번씩 물으셨다. 같이 살던 아들이 안 보이니 불안하실 밖에. 정답은 어떤 것을, 몇 번을 물으시든 “무시하지 말고 몇 번이고 알려” 드려야 옳겠지만 현실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내가 나빠서도, 어머니가 나빠서도 아니다. 책에는 같은 내용을 몇 번씩 묻는다면 그 대답을 메모해서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라고 말한다. 종이가 보이면 접어서 주머니에 집어넣는 우리 어머니한테는 불가능한 솔루션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는 그나마 어머니 정신이 지금보다는 확실히 온전하셨네. 반응이 늦기는 했지만 전화기도 쓰실 수 있었고, 누군가 보이지 않아도 전화기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확실히 인지하셨네. 요즘은 텔레비전에서 와글거리며 밥 먹는 사람들 보이면, “저 사람들 누구여? 왜 여기서 밥을 먹어?” 하실 때가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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