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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Nov 21. 2024

고빗사위

'엄마, 지금 어디쯤 가 있어?'

그해 봄의 가족 모임은 전주에서 갖기로 했다. 대구에서, 이천에서, 일산에서 각기 출발했는데, 부모님을 모시고 대구에서 출발한 큰언니의 얼굴을 본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 오는 동안 뭔 일이 있었구나. 까닭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엄마가 집에서 밥이며 반찬을 잔뜩 싸 와서는 숙소에 도착하는 오빠, 언니네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먹으라며 내미는 것이었다. 몇 시간씩 차에서 시달린 사람들이 입맛이 돌 리 없는 상황이고, 휴게소에서 다들 뭔가 챙겨 먹고 온 길이었다. 휴게소에서 간단히 사 먹자는 큰언니 말을 엄마는 깨끗이 무시했다. “돈 아깝게 왜 사 먹냐”는 것이 엄마의 주장이었다.      


문제는 엄마가 싸 온 음식이라는 것이 뭔가 특별한 것들이 아니고 누가 봐도 냉장고에 있는 반찬 아무거나 마구 담아 온 듯한 모양새라는 것이었다. 호화찬란 도시락까지는 아니어도, 저렇게 아무렇게나 싸 오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내게도 엄마는 막무가내로 젓가락을 내밀었다. 나물을 먹는데, 몇 시간 차로 이동하는 동안 상한 듯해서 “엄마, 상했네. 먹지 말자” 했더니 그때부터 완전히 삐쳐 버린 엄마. 지금이 쌍팔년도 아니고 여행 오면서 꼭 그래야만 했나, 싶은 나도 마음이 상하고 말았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엄마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것을. 돈 아까워 벌벌 떠는 거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니 그렇다 쳐도, 모두에게 시위라도 하듯이 상한 나물을 꾸역꾸역 끝까지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고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은 한옥마을에서 유명하다는 국밥집에서 먹었다. 순대국밥 한 그릇을 국물도 없이 싹 다 먹고 나서는 주인에게 다 들리게 “맛도 하나도 없다. 남길 수가 없으니 다 먹었지” 하실 때 엄마의 문제를 느꼈어야 했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다 못 먹고 남긴 삼계탕을 기어코 싸 가겠다며 식당 종업원을 부르고, 처음부터 따로 포장해 둔 음식이 아닌 이상 안 된다고 하는데도 “탈이 나도 내가 날 거니까 그냥 싸 달라”고 우기는 엄마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여행이라는 일탈이 엄마를 불편하게 했고, 그 불편이 불뚝성을 부른 거라고만 생각했다. 식구들 모두, 엄마는 원래 좀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분이지, 하는 정도로 덮고 넘어가려 했다. 엄마 눈치 보느라 여행 내내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던 여행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또 까맣게 잊었지. 그냥, 엄마가 화가 좀 많아졌네, 정도로만 생각하면서. 그때 우리 식구 누구도 엄마의 그때가 고빗사위였음을 알지 못했다. 그때 알았더라면, 뭔가 좀 달라졌을까?      


다음 해, 제주에서 본 엄마는 안 그래도 될 것들을 몹시 의심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바다 앞 횟집에서 회를 먹는데, 우리가 골라 놓은 생선을 다 주지 않고 빼돌릴지 모른다며 생선 손질하는 주인 옆에 내내 서 있더라. 그저 부끄럽다고만, 정말 다시는 같이 여행 오지 말아야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몰랐다. 인지 장애, 기억력 소실, 그런 증상이 아니라 성격이 포악해지거나 다른 이의 감정은 상관하지 않는 상태로 진행되는 치매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진단을 받고, 자료를 찾아보면서, 서서히 진행된 엄마의 병을 돌아보고서야 겨우 손에 잡히는 흐름이었다. 그저 엄마가 나이 들더니 이상해진다고만 생각했지, 그런 엄마가 싫다고만 생각했지, 엄마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가 닿질 못했다.     


구례에서 봄꽃 구경을 하고 벌교로 건너가 꼬막정식을 맛나게 먹었던 어느 해 봄, 엄마가 그랬다. 

“나 죽기 전에 이거 먹으러 또 울 수 있을라나?” 

엄마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내년에도 오고, 그 다음해에도 또 오지 뭐. 꼭 오자” 쉽게도 말했다. 부질없는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엄마의 몸은 긴 여행을 견디기 힘든 상태가 되고 말았다. 어떤 때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갈비뼈 겨우 붙었다 싶으면 아버지가 편찮으시고, 아버지 좀 괜찮아지셨다 싶으면 엄마 기침이 심해지는 식이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큰언니가 곁에서 살펴 드리는 동안 나는 겨우 한 달에 한 번, 1박 2일, 엄마의 기저귀를 갈고, 엄마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밥을 차려 드리러 대구 집에 내려간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한 뒤 “누구 엄만데 이렇게 예뻐?” 하면 “은주 엄마!” 대답도 곧잘 하시고, 집을 나설 때는 “얼른 갔다 와” 하면서 손도 흔들어 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엄마 몸속에 갇힌 영혼이 갈 곳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상태다.      


허수경 시인이 그랬다. “어두운 날이면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을 걷다가 잠시 쉬다가 하늘이 없는 어디쯤에 가서 하얀 꽃이 되고 싶다”고. 아무리 불러도 정신을 못 차리고, 대답을 못 할 때의 엄마를 보면 묻고 싶다. 

‘엄마, 지금 어디쯤 가 있어?’ 

엄마가 머무는 어디메쯤에 같이 가서 한참씩 같이 앉아 있다 돌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눈이 저렇게 텅 비기 전의 그날로 돌아가, 엄마가 내미는 상한 나물을 냠냠 맛있게 받아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질없지만. 그런 생각을 해 보는 오늘의 나. 


* 고빗사위

: 매우 중요한 단계나 대목 가운데서도 가장 아슬아슬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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