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좀 틀렸어도
고기 떼인 줄만 알았다. 그이들의 모습은 뉫살의 고기 떼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침노을을 등지고 항구를 향해 들어오는 사람들의 소리는 멀었다. 그러나 적막하지 않은 소요가 함께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들리지 않아도, 그런 건 그냥 알게 되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런 건 그냥 보기만 해도 알아지는 것이었다. 집어등을 끄지 않은 채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은 거친 사내들의 함박웃음을 함께 싣고 있었다. 그 배가 멀리서도 왜 그리 빛나는가 했더니 만선의 기쁨 덕이었다.
밤새 오징어들을 불러모았을 집어등은 피곤한 얼굴로 흔들리고 있었으나 선원들은 갑판 위에 가득한 오징어를 내리며 목소리가 절로 들떴다. 구경꾼인 나는, 전날 밤 늦게까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새벽에야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이고 묵호항에 도달한 나는, 분주한 항구의 소란에 방해꾼이 된 것 같았던 나는, 한구석에서 그저 가만했다.
밤을 보내고 새벽 항에 도착한 이들이 피곤하지 않을 리 없었으나 가득한 오징어와 함께 돌아온 그들의 팔뚝에선 피곤을 눈치채기 어려웠다. 만선의 기쁨이 피곤을 잠시 막아 세우고 있는 것인지, 흔들리는 배 위에서 무사히 육지로 돌아왔다는 안심이 눈꺼풀의 무게를 잠시 잊게 하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미안해지는 치열한 순간에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애쓸 뿐.
오래전의 한순간, 묵호항에 머물렀던 이른 아침의 몇 시간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도 꽤나 생생하다. 고기잡이배가 들어오는 현장을 목도한 것도, 그 배에서 내린 오징어를 바로 손질해 초장에 찍어 먹으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밤의 숙취가 풀리지 않은 상태인데도 새벽 술이 넘어가는 짜르르한 날카로움은 내장이 아니라 뇌를 베어내는 것처럼 쨍했다.
“먹기만 하지 말고 사기도 하쇼.”
서울까지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주머니에라도 넣어 가고 싶을 만큼 맛있었지만, 어렸던 나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갓 잡은 오징어 같은 건, 살아가는 동안 얼마든지 또 먹을 수 있는 줄만 알았지. 그런데 아니더라. 살아보니, 그렇게 격렬하게 쫄깃하고 생동감 있는 오징어를 다시는 못 먹었다. 사는 게 그런 것이더라.
여기까지 쓰고 나서, 오래된 파일을 뒤적여 그때 찍은 사진들을 다시 열어 보았다. 그날의 묵호항 사진 중에서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은, 생명력 넘치는 경매상이나 젊은 어부나, 오징어를 잘라 파는 아낙이 아니라 힘겨운 생을 등에 짊어진 늙은 어부였다. 필시 지금은 이주노동자가 채우고 있는 자리일 것이다. 이렇게 나이 든 할아버지가 있었다고? 기억 속에서는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던 풍경이다. 아, 그 고단한 표정은 당시의 나에게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구나.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라는 심리학자가 그랬단다. “기억은 단순한 정보 저장소가 아니라 경험을 재구성하는 복잡한 인지적 과정”이라고. 그래서 외부환경이나 감정 상태, 사회적 요인 같은 것들에 쉽게 영향을 받고, 조작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이다. 결국, 내가 기억하고 있던 묵호항의 어부들은 내가 기억하고 싶은 모습으로, 환하고 억세고 강인한 채로 박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 어부들의 신산함이나 고단함은 싹 도려낸 채로 말이다.
그럼에도, 내 기억 속의 묵호항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난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내가 그 시간 속에 있기 때문이고, 그때 내가 받아 안은 것들과 지금 내 눈에 크게 들어오는 것 사이의 간극이야말로 생이 주는 질문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 그나저나 큰일이다. 오징어회의 그 쫄깃함을 떠올려버린 내 입을 어쩌면 좋을까.
* 뉫살
고기가 떼 지어 모이는 곳에서 이는 물결. 거품과 함께 물결에 주름이 잡히면서 흔들린다. (표준국어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