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실감 나지 않던 시작, 실감 나는 현실
해외 주재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걸까
출국을 고작 일주일 앞두고서야 이래도 괜찮은 건지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이제 와서 되돌릴 방법은 없었고 가기로 결정한 이상, 남은 일주일 안에 뭐라도 결정을 해야 했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집에서는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자마자 남편과 함께 카페로 향했다.
각자의 노트북화면에는 구글맵과 부동산 사이트가 떠있었다.
남편이 지난 출장 때 보고 온 지역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추천받은 동네들이었지만 직접 가보니 집이 너무 낡았고, 공원의 놀이기구들도 마찬가지로 오래되어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길이 좁아 아이들과 걷기에는 위험해 보인다는 게 남편의 설명이었다.
모든 걸 만족시키는 곳을 찾는 건 내 욕심일까
둘이서 한참 모니터를 들여보다가
우연히 직장과의 거리가 제법 되지만 새로 지은 맨션과 커다란 공원이 있는 지역을 발견했다.
남편의 출퇴근이 힘들어지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유일한 지역으로 보였다.
우리는 부동산 사이트에 있는 집 도면을 한참 띄워놓고 고민하다 회사에 승인 요청을 보냈다.
의외로 승인은 몇 시간 만에 났고 곧장 일본 부동산 담당자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직접 가보지도 않은 나라의 낯선 동네
사진 몇 장과 도면만으로 이렇게 결정해도 될까 싶었지만, 시간에 쫓기는 우리 가족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주일 뒤면 우리가 그곳에서 일상을 살게 될 거라는 사실도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그런데,
부동산의 답변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심사 기간만 일주일, 입주 청소까지 고려하면 1월 중순에나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빈집인데 왜 임차인이 원하는 날에 들어가지 못하는 걸까?
알고 보니 일본은 집주인의 승인을 받는 ‘심사’가 필수였고,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이후부터 1월 초까지 이어지는 긴 연말연시 연휴가 복병이었다.
운이 좋아야 1월 중순, 만약 심사에서 거절당한다면 상황은 아찔했다.
우선 일주일정도 머물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다.
아이들 어린이집 방학이니 가족 여행 간다는 생각으로 같이 갔다가 혹여나 심사에 떨어지거나 입주가 늦어지면 남편은 두고 아이들과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차선책까지 세워두었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다행히 주택 승인은 3일 만에 났고, 입주일은 1월 15일로 정해졌다..
출국일은 크리스마스 오후
평소라면 아무 의미 없는 크리스마스였지만
내심 좋은 일만 생기길 바라는 기대를 품으며 일주일 치 짐을 챙겼다.
생각해 보니 아이들과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는 일도 처음이었다.
짧은 비행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이 잘 버텨줄지 걱정되어 과자와 퍼즐, 스티커 북을 잔뜩 챙겼지만,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이들은 이륙하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비행기 타는 게 즐겁고 재미있을 거라고 말은 하면서도 나름 긴장했던 모양이다.
무사히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짐이 너무 많아 안내 데스크에 대형 밴을 요청했지만 시간이 늦어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당연히 가능할 줄 알았던 일들이 어긋나기 시작하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남편이 택시 승강장을 확인하러 먼저 나갔고,
나는 커다란 캐리어 네 개와 이사 상자 두 개, 그리고 아이 둘과 함께 덩그러니 공항 로비에 남겨졌다.
얼마 뒤 돌아온 남편의 표정은 어두웠다.
"왜? 택시가 없어?"
"아니... 밖에 비 와."
그 말에 밖을 보니 꽤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빗줄기 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 택시 줄이 늘어서 있었다.
후쿠오카에서의 첫날.
우리 가족을 맞이한 건 낭만적인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닌 차가운 겨울비였다.